1. 내년도 예산안이 우여곡절 끝에 오늘(12월 24일) 새벽 국회를 통과했다.
2014년 국회선진화법 시행 이후 처음으로 예산안이 법정 처리 시한(12월 2일)과 정기국회 종료일(12월 9일)을 넘기는 사태가 벌어졌다. 핵심 이유 중의 하나가 법인세율 수준에 대한 여야 간의 이견 때문이었다.
윤석열 정부의 첫 세제개편안이 국회 심의 과정에서 제동이 걸린 것은 표면적으로는 여야 간 입장 차이에서 비롯됐지만, 본질적으로는 새 정부가 들어섰음에도 향후 조세재정운용방향에 대한 큰 그림 제시 없이 세제개편을 단편적으로 접근하여 폭넓게 국민적 공감대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2. 정부가 조세정책과 관련하여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임기 5년의 재정지출 규모를 전망하고, 이 중 세금으로 얼마를 조달할 것인지 거시적인 적정 조세부담률 목표를 설정한 후 이를 세목별 세원별로 공평하게 부담시킬 방안에 관해 큰 틀의 조세정책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세금은 국민의 삶과 기업의 경제활동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규모의 적정성’(조세부담률)과 ‘부담의 공평성’(응능부담원칙)이 요체이다. 세금이 과중하거나 공평하지 못하면 조세저항을 야기하고 과소하면 본연의 기능인 나라 살림을 뒷받침할 수 없다.
내년을 비롯해서 향후 세제개편은 이러한 중장기 조세정책방향을 단계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방안으로 마련하여야 조세정책의 예측성 일관성 안정성이 유지되고 국민적 공감대를 확보할 수 있다
3. 조세부담률은 재정건전성을 담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적정화해나가야 한다.
「재정건전성」은 우리와 같은 소규모개방경제(Small Open Economy)가 대외충격을 흡수하면서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성장을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할 성역이다. 우리가 97년 IMF 외환위기와 2008년 세계 금융위기를 조기에 극복할 수 있었던 것도 대규모의 공적자금과 재정을 투입할 수 있는 건전재정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다.
OECD 발표에 의하면 우리나라 조세부담률은 2020년 기준으로 20.0%(국민부담률 27.7%)로서 OECD 국가의 평균 조세부담률 24.3%(국민부담률 33.5%)에 비해 상당히 낮은 수준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적정 조세부담률 수준은 얼마일까? 이는 재정여건을 종합적으로 감안하여 정부가 제시해야 할 사항이나, 분명한 것은 현재 보다 떨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그 이유로는 먼저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분단된 국가로서 매년 막대한 국방비(22년 54.6조 원, GDP 대비 2.6%)를 지출하고 있다. 또한 빠른 속도로 저출산 고령화가 진행되고 사회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재정수요 역시 그 어느 나라보다도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그 결과 재정수입이 재정지출을 따라가지 못하면서 매년 대규모 재정적자가 발생하고 있고 이로 인해 국가채무가 급증하면서 재정 건전성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러한 재정적자나 국가채무의 증가 원인이 재정규모가 비대해서 생긴 것이라면 재정지출을 줄여서 해결하면 될 일이다. 그러나 GDP대비 일반정부 총지출이 우리나라는 37.7%(21년 기준)로서 OECD 평균 46.4%보다 크게 낮다. 오히려 정부의 더 적극적인 역할이 요구되는 상황이다.
이처럼 한국의 재정여건과 재정규모 그리고 국제적인 조세부담 수준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현재보다 조세부담률을 낮추는 대규모 감세 조치는 극히 경계해야 한다. 민생안정과 경제활력 제고 등을 위해 감세 조치가 불가피하다면 대체 세원을 발굴하여 조세부담률이 떨어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 조세부담률을 적정화해 ‘저부담 저복지’에서 ‘적정부담 적정복지’로 가게 되면 양극화 해소, 소비진작, 성장률 증가 등 경제에 미치는 긍정적 효과가 많다.
4. 세금의 생명인 ‘공평성’을 제고하고 국민이 공감하는 조세정책을 펼쳐야 한다.
우리 조세부담률이 다른 선진국에 비해 낮은 데도 많은 국민들이 세금이 무겁다고 생각하는 것은 세금 부담의 공평성과 관련된다. 세금이 각자 능력에 맞게 공평하게 부담되면 체감 부담은 낮아지고, 반대로 내는 사람만 많이 내면 체감 부담은 커지게 된다. 이처럼 국민이 체감하는 조세부담은 국가 전체의 조세부담률 수준이 아니라 “왜 내 세금이 다른 사람보다 많은가? 왜 과거보다 세금이 크게 증가했는가? 왜 내 세금을 이런 곳에 낭비하는가?”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조세당국은 ‘불환빈 환불균(不患貧 患不均· 백성은 배고픔보다 불공정한 것에 분노한다)’의 교훈을 항상 가슴에 새겨야 한다.
또한 조세정책은 이론적 타당성이나 논리적 정당성만으로 성공할 수 없고 국민들의 수용성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세금은 국민경제생활이나 기업 경영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정부가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면 반드시 실패한다. 국민이 공감하는 세제가 가장 좋은 세제이므로 조세개혁은 국민과 함께 만들어 간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우리가 어떠한 조세제도를 갖느냐의 문제는 우리 사회의 의식구조와 국민들의 납세의식 등 현실 여건에 큰 영향을 받는다. 아무리 취지가 좋은 세금이라도 국민들이 악세라고 생각하면 세금 내기를 꺼려 하고 조세 마찰이 발생한다.
5. 국가정책수단으로서 사회 양극화 완화를 위한 조세정책의 역할은 높이되, 경기 진작 수단으로서 역할은 최소화해야 한다.
개방화 자율화 시대에 재정은 국가가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인데, 우리나라 재정의 소득재분기능은 OECD국가 중 최하위 수준이다. 재정이 부익부 빈익빈 등 양극화 문제에 적극적인 역할을 못하거나, 조세가 moral hazard(도덕적 해이)를 조장한다면 시장경제는 건전하게 발전할 수 없다. 따라서 조세정의와 사회 양극화 해소를 위해 조세의 소득재분배 기능은 강화해야 한다. 많이 벌고 조금 내는 ‘양극화 심화’ 세제에서 여유 있는 계층이 더 많이 내는 ‘양극화 시정’세제로 전환해 나가야 한다.
조세는 재정지출에 비해 경제성장 등 경기 조절 기능이 매우 제한적이고 간접적이므로 꼭 필요한 경우에 한시적이고 제한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능력 있는 경제주체로부터 적정한 세금을 거두어 재정지출을 통해 시급한 민생안정이나 경제활력 분야에 사용하는 것이 경기회복에 더 효과적일 뿐만 아니라 양극화도 완화할 수 있다.
대기업·고액재산가·고소득자에 대한 감세를 통해 경제를 살리겠다는 낙수경제론이 비판받는 것도 경기 활성화 효과에 견줘 조세부담의 공평성과 소득재분배 기능을 결정적으로 훼손시키고 재정건전성을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강조하자면 조세는 ‘소득이 있는 곳에 세금이 있다’는 원칙에 충실하여 중립적으로 운영하고, 가급적 정책수단으로 이용되는 것을 최소화해야 조세정책이 남용되지 않고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 특히 세금을 이념적 감정적 대응수단으로 이용하면 반드시 실패한다.
6. 지금은 자본과 노동이 자유롭게 이동하는 ‘국가선택시대’이므로 「넓은 세원, 낮은 세율」체계를 통해 조세의 국제경쟁력을 높여가야 한다.
국가 간 조세 경쟁이 심화되고 조세정책의 국가 간 연관성이 커져 독불장군식 조세정책은 더 이상 통용될 수 없다. 하나의 시장을 놓고 세계가 경쟁하는 시대이므로 국내적 공평성 못지않게 국제적 공평성과 조세의 국제경쟁력도 중시해야 한다. 과거에는 세금이 무거우면 저항하거나 탈세로 대응했지만 지금은 세 부담의 국제적 공평성과 조세 경쟁력이 떨어지면 사람과 돈과 기업 등 세원이 해외로 이전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넓은 세원 낮은 세율」은 세 부담의 공평성 제고, 조세제도의 경쟁력 강화, 국민의 체감 조세부담 경감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각국의 세율 인하 경쟁에 효율적으로 대처하면서 건전재정을 뒷받침할 수 있다. 높은 명목세율은 탈세를 조장하고 근로의욕과 사업 의욕을 감퇴시킨다. 또한 지금은 개방화 자율화와 인터넷의 즉시성과 탈 지역성으로 누진과세 등 수직적 형평성을 고집하기 어려운 환경이므로 비과세 축소 등 과세대상을 넓히는 수평적 공평성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