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독백

3월에 핀 꽃이 4월에 지고 맞이한 5월, 그 5월을 희망과 사랑의 계절이라고 한다. 시인 노천명은 ‘푸른 오월’에서 “오월은 계절의 여왕”이라고 불렀다. 수필가 피천득도 오월을 찬양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시 ‘오월’). 올해로 100회째를 맞이한 어린이날도, 50회째인 어버이날도 5월이다. 그래서 ‘가정의 달’이라고 하는가 보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생각지 못한,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그늘진 곳이 여전히 남아있다는 것도 불편한 사실이다. 5월은 이리저리 생각이 많은 계절이다.

사촌 누나가 한 동네에 산다. 서울 강북에 소재하는 모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다. 자란 곳은 시골이지만, 비슷한 시기에 서울생활을 시작했다.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내다보니 멀리 떨어져 있는 형제누이들만큼이나 편하다.

누나를 만나면 요즘 아이들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도마 위에 오른다. 방송에서나 봤던 가슴 아픈 일들이 현실에 등장한다. 주변에 이혼 한 사람은 여럿 보면서도 결손가정 아이들을 접할 기회가 없어서일까. 가출하거나 무단결석 하는 아이, 부모로부터 폭행을 당하는 아이, 사춘기의 예상치 못한 돌발행동으로 경찰서를 찾는 아이, 말이 없어 속을 태우는 아이, 까닭모를 이유로 전전긍긍하는 아이들 등 소외받고 있는 우리의 아이들.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할 만큼 힘든 경우도 있단다. 벌어진 결과는 있지만, 그 원인을 찾는 것에서부터 재발방지를 위한 치유책이 간단치 않아 힘들어 한다.

어릴 적 5월 이맘때면, 내 고향 남쪽 땅 끝 보리밭은 청맥으로 우거진다. 어린 시절의 보리밭은 저마다의 다양한 색깔로 추억이 물들어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가곡 “보리밭”-6‧25 전쟁 통 속에서 청소년에게 사랑과 서정을 주기 위해 지었다는-을 무심결에 흥얼거리며, 누군가의 풋사랑이 녹아있는 장소로도 회자된다.

소중한 추억보다는 아픈 기억으로 각인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이었다. 술을 드신 아빠와 심한 싸움이 있던 날, 엄마 손에 이끌려 여동생과 함께 보리밭 한 가운데 숨죽이며 숨었던 장소다. 보리밭에서 엄마와 여동생은 무슨 생각을 하며 웅크리고 있었을까. 어둠이 깔리고 스산한 바람에 흔들리는 보리밭 속에서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두려움과 무서움이 엄습했다. 한동안 나에게 5월은 희망과 사랑 대신, 절망과 분노의 기억으로 남았다.

요즘 ‘육아 대통령’으로 불리는 오은영 교수님을 그 당시에 만났다면 심리치료 진단을 내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회재불우’(懷才不遇)의 삶을 사셨던 그 시절의 엄마아빠와 함께. 고향을 찾을 때면, 지금은 과수원으로 변해버린 어느 5월의 보리밭이 어른거린다.

50년도 지나 위로하고 위로 받고 싶은 그 마음 아직도 크고 깊은데, 어쭙잖은 <독백>이라 서글프다.

<독백>

아마도
엄마아빠는 악마일지 모른다.
무섭고 떨리는 괴담을 퍼트리는 악마
친구는 경쟁의 대상이며
우정보다 성공한 사람이 되라고 유혹 한다
세상이 다 알아도 엄마아빠에겐 하나 잘못 없다.

그래도
사랑이라는 단어만은 기억하자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게 되는 날
귀가 따갑게 들었던 공부 소리도
엄마아빠의 싸움소리 마저도 그리워질 테니

언제나
희망이라는 단어만은 품고 살자
세상이 야박하더라도 포기하지 말자
희망을 갖고 살다보면 운명처럼 기회를 움켜지게 될 테니

마침내
5월의 청맥이 영글어가듯
가졌던 분노는 사그라지고 행복한 미소를 보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