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세자를 위한 작은 위안

십수 년 전의 일입니다. 세무조사가 막바지에 이를 즈음이었습니다. 조사팀이 오후 이른 시간에 철수하고 수감실에 남은 대리인과 회사측 실무자들이 자료 정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병원 원장님이 찾았습니다. 경과 사항을 브리핑하자, 생각한 세금 규모와 차이가 너무 컸던 모양입니다. 얼굴색이 달라졌습니다.

세금 앞에서는 사회적 명성이나 품위, 체면 같은 건 그리 중요하지 않나 봅니다. 몇 마디 대화가 더 이어지면서 목소리 톤이 높아졌습니다. 그러더니 혼절한 듯 갑자기 쓰러졌습니다. 순간 수감실은 아수라장이 됐습니다. 깜짝 놀라고 부르짖는 듯한 다급한 목소리, 연이어 들리는 통화음, 이리저리 불규칙적으로 움직이는 발걸음이 혼란스러웠습니다. 힘겹게 소파로 옮길 즈음에 회사 직원들이 우르르 몰려왔습니다. 그리고 일순간 사라져갔습니다. 우리는 넋을 잃고 미라처럼 굳어졌죠. 침묵의 어둠이 엄습해왔습니다.

다음날, 원장님의 얼굴이 수척해 보였습니다. 조용히 뭔가를 내밀었습니다. "어젯밤 한숨도 못 잤습니다. 밤새 뒤척이다 쓴 시입니다" 그리고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그가 시인으로 등단했다는 이야기는 업무를 시작할 즈음에 들었습니다. 자신의 작품이 실린 몇 권의 잡지 책을 건내 받은 기억도 납니다. 십몇 년 전의 일이지만 제목만은 또렷하게 떠오릅니다. '괴물'. 구체적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조사팀에 대한 원망을 가득 담고 있었던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한동안 시의 제목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본인의 불만과 아쉬움이 담긴 심정을 조사팀에 전해달라는 취지였을 수도 있습니다. 품속에 '괴물'을 넣고 조사팀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끝날 때까지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당시 원장님의 심정을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 일시에 부담하게 될 세금 규모가 이전 세무조사시 금액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사회적 기업인으로서 역할에 대한 자긍심도 컸습니다. 전언에 따르면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 무료진료 등 국위 선양과 다양한 사회봉사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역할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현직에서 은퇴한 사람들이 농반진반으로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시 현직으로 되돌아가 일할 기회가 생긴다면 납세자의 사정을 훨씬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정말 그럴지는 의문이 남지만, 현직에서 바라본 시각과 현장에서 겪는 현실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실토한 것일 수 있습니다.

일하다 보면 세금과 죽음을 대하는 감정 사이에 묘한 공통점을 느끼게 됩니다.
죽음학의 전문가로 알려진 스위스 출신의 정신의학자 '퀴블러 로스(1926.7.8.~2004.8.24.)'는 《On Death and Dying》에서 "인간은 죽음 앞에서 부정(denial), 분노(anger), 타협(bargaining), 우울(depression), 수용(acceptance)의 다섯 단계의 감정을 거친다"고 보았습니다.

'당신은 곧 죽게 될 것이다'는 의사의 진단 결과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처음에는 일단 부정부터 하게 될 것입니다. 납세자 또한, 왜 나를 세무조사하는 것인지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일단 부정하게 됩니다.

그다음에는 분노로 이어집니다. "왜 하필 지금 내가 죽어야 하느냐"면서요. 납세자는 "성실하게 세금을 냈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왜 조사대상에 선정된 것이냐"며 분노하게 됩니다.

다음 단계에 이르게 되면 죽음에 숙연해져 조금이라도 더 생명을 연장할 수 없을지 초조해하며 타협을 시도합니다. 세무조사에서도 심리적 상황은 비슷합니다. 세금 추징이 불가피하다면 최소한의 세금이라는 타협안을 찾으려 할 것입니다.

타협의 과정을 거쳐도 '죽음은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면서부터 심한 우울 증세에 빠지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세금 타협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식한 납세자는 침울해 지면서 심각한 우울증에서 헤어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종국에는 죽음을 수용하게 됩니다. 납세자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수긍하게 됩니다.

슬프고 무섭고 외롭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환자를 위해 위안과 안락을 베푸는 사람들을 호스피스(Hospice)라고 합니다.
세무조사 통지를 받는 순간 대부분의 납세자들은 심리적 충격을 받게 됩니다. 세무조사과정에서 납세자의 권익을 제대로 챙겨주는 역할 뿐만 아니라, 납세자의 심리적 안정까지도 살펴주는 전문가들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이들을 택스피스(Taxpice)라고 부르겠습니다.

살아있는 우리에게 '죽음으로 하여 아름다워지는 생명을 주신 것이다'며 위로했던 어느 시인을 떠올리면서, '세금으로 하여 아름다워지는 세상을 주신 것이다'고 하면 납세자들에게 작은 위안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 글쓴이 : 김종봉 세무법인 더택스 대표세무사
[약력] 서울청 국선세무대리인, 중부청 국세심사위원, 가천대학교 겸임교수, 법무법인 율촌(조세그룹 팀장), 행정자치부 지방세정책포럼위원 / 가천대학교 경영학 박사 / 국립세무대학 3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