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홍범도, 간토학살, 파친코

이민진 장편소설 '파친코'의 첫 문장이다.

당초 모국(Motherland)이라는 제목으로 쓰던 소설이 '파친코'로 변경돼 출판됐다고 한다.

이 책은 역사적 재앙에 맞선 개개인의 이야기가 담겼다. 1부('고향 1910~1933')는 부산 영도의 고향을 배경으로 한다.

소설의 배경이 된 시기가 하필 1910년이라는 것도 그리고 첫 문장을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는 체념섞인 단호함으로 시작하는 것도 시사하는 바가 있으리라.

1910년 8월 29일은 병합 조약의 공포와 함께 일본 제국 천황이 한국의 국호를 고쳐 조선이라 칭하는 안건과 한국 병합에 관한 조서를 공포하여 한국이 일본에 강제 병합된 날이다. 다른 말로는 국권피탈(國權被奪), 한일합방(韓日合邦), 한일병탄(韓日竝呑)이라고 부르며, 한일합방이 아니라 한일병탄이 정확한 표기이다. (출처: 위키백과)

'파친코'는 국가를 잃어버린 역사적 재앙이 시작된 시기에도 변함없이 모진 삶을 살아내야 하는 민초의 이야기다.

식민지 시대 간난신고의 삶을 견뎌내야 했던 4대(代)가 부산에서부터 일본에 정착해 살아가는 가족(서)사를 담고 있다.

국가를 잃어버린 하층민이 감내해야만 하는 2중 수탈구조 속에서도 끝내 버티며 살아내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역사적 재앙(국권피탈)과 그 재앙에서 비롯된 굴곡진 삶들을 견디고 살아가는 모든 민초들에 대한 헌사이다.

한일병탄 이후 시기(1920년대) 많은 조선인이 먹을 것과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쫓겨가듯 떠나야 했다.

그리고 일본에 정착한 조선인들 다수는 '불령선인'(不逞鮮人)이라는 낙인 아래 하층민 중의 하층민으로 생활고에 시달리는 삶을 전전해야 했다.

간토 대지진은 그 시기 일본 위정자들과 그에 부역한 언론에게 노출된 훌륭한 사냥감 내지 먹잇감이었다. 사회 불안이 고조된 시기에 일본 정부와 언론을 중심으로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사회 혼란의 원인이 마치 조선인들에게 있는 것처럼 왜곡한 사건이 바로 간토대학살 사건이다. 특히 국가(일본 정부)로부터 허용된 자경단(自警团)에 의한 학살이 자행된 것으로 일부 드러난 바 있다.

파친코의 등장인물들이 그러했듯이, 간토학살의 희생자들 역시 국가로부터의 보호막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조국을 잃어버린 불령선인들의 운명적 현실이었다.
그러나 간토학살에 대한 진상규명은 아직까지 일본에 대한 국가책임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지난 100년의 시기를 거치면서 국가가 없었던 (식민지)시기에는 그렇다치더라도, 그 이후 국권이 회복되고 여러가지 한일협상 과정에서조차 간토학살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우리 국가의 역할이 부재했다는 점은 '역사적 재앙'에 가깝다.

소설 파친코의 표현을 빌리자면, '역사는 (혹은 국가는) 간토학살의 희생자들을 또 한번 저버렸다.'

■ "역사는 반복된다, 한번은 비극으로 한번은 희극으로"

지난 5일 '간토학살100주기 추도사업추진위원회'는 지금까지의 경과를 설명했다.

사건 발생 80주기가 되는 2003년 일본변호사연합회는 재일동포 문무선의 인권구제신청 건을 조사하면서 "국가는 간토대진재(關東大震災) 직후의 조선인, 중국인에 대한 학살사건에 관하여 군대에 의한 학살의 피해자, 유족 및 허위사실의 유포 등 국가의 행위에 유발된 자경단에 의한 학살의 피해자, 유족에 대해 그 책임을 인정하고 사죄해야 한다. 그리고 국가는 조선인, 중국인 학살의 전모와 진상을 조사해 그 원인을 밝혀야 한다"고 권고했다.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아무런 공식 반응이 없었다.

이후 일본 국회에서 2015년부터 의원들이 수차례에 걸쳐 일본 정부의 국가책임에 대한 공식 입장을 질의했고,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정부 내 공식자료가 없어 대답하기 어렵다"는 답변만을 반복했다.

이에 (일본) 의원들은 간토학살 100주기를 맞아 정부 관료들을 의회에 출석시켜 관련 자료의 존재, 어디에서 이 자료들을 찾아볼 수 있는지, 그리고 국가책임을 증명하는 구체적인 내용까지 들며, 국가개입 사실을 인정하도록 추궁했으나, 일본 정부는 국가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여기서 더욱 문제인 것은 한국 정부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간토학살 사건에 대해 일본의 국가책임을 추궁하기 위한 진상규명을 요구하거나, 관련 자료를 요청하지 않았으며, 추도식은 고사하고 6600여명의 학살피해자를 위한 추도사를 발표한 일도 없다는 사실이다.

이에 한국의 역사단체와 재일동포 인권단체, 평화운동 단체 등 50여 시민사회단체들은 2022년 7월 12일 '간토학살100주기추도사업추진위원회'를 결성해 간토학살 특별법 제정 및 한국에서의 간토학살 100주기 추도문화제, 일본에서 열리는 간토학살 현장 추도행사 참여, 그리고 한일시민들과 함께 간토학살의 국가책임 인정을 촉구하는 연대활동을 펼치기로 결의했다.

간토학살100주기추도사업추진위원회는 지난 8월 31일 오전 사이타마 간토학살 피해자 구학영 100주기 추도식을 시작으로 31일 저녁부터 9월 첫주 주말까지 간토지역 곳곳에서 개최된 추도행사와 관련행사에 참여했다.

최근 보수언론과 정부 여당을 중심으로 윤미향 무소속 의원 등 참가자들에게 색깔론을 내세워 종북몰이를 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가 간토학살의 진상규명에는 입도 뻥긋하지 않고, 진상을 밝히려는 사람들을 상대로 벌이는 종북몰이는 100년 전 간토학살의 일본 정부와 언론의 행태와 놀랍도록 닮아있다.

"역사는 반복된다. 한번은 비극으로, 한번은 희극으로", 칼 맑스가 변증법론자 헤겔의 말을 인용했다는 이 말은 100년의 시간을 두고 한번은 비극으로, 한번은 희극으로 재현되고 있다.

그러나 비극적 서사의 진상을 규명하려는 노력을 희극으로 몰아가는 종북몰이 색깔론은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실존적 물음 앞에 희화화된다. 자국민을 보호해야 한다는 국가의 본질 앞에 모습을 감춘 국가 부재의 재앙이라니.
국가를 잃어버린 1920년대 무장 독립투쟁의 역사를 뚜벅뚜벅 걸어 역사의 재앙을 넘어보려했던 포수 출신 항일독립투사에게 역사적 배경에 대한 몰이해를 드러내는 정부 홍위병들의 천박한 '희극'이 국민들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그래서 파친코 소설의 첫 문장을 이렇게 고쳐본다.

"국가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그리고 이 체념섞인 단호함에 대한 공자(孔子)의 답이다.

"군주는 배요, 백성은 물이니,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또한 배를 뒤집기도 한다(君者舟也 庶人者水也 夫水所以載舟 亦所以覆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