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세청의 심상치 않은 행보가 시작됐다.
그동안 일부 대기업들 사이에서 '소문'으로만 나돌던 대형 세금분쟁의 불씨를 제대로 지필 기세다.
개별 케이스에 따라 갈리겠지만 국세청의 행보에 따라 일부 대기업들은 수 백~수 천억원에 달하는, 생각지 못했던 엄청난 액수의 '세금폭탄'을 맞게 될 것으로 보인다.
분쟁의 원천은 미국과 유럽 등 해외시장 개척과정에서 국제 카르텔 행위, 즉 담합 혐의 적발로 인해 발생한 손해배상금 또는 합의금(민사) 및 이와 관련해 지출한 크고 작은 소송비용(변호사 비용 등)에 대해 국세청이 과세 움직임을 본격화하면서 비롯되고 있다.
14일 국세청과 재계에 따르면 국세청은 최근 '독점금지법 위반 관련 자료제출 안내' 문서를 국내 유수의 대기업들에게 보낸 것으로 확인됐다.
구체적으로 몇 개 기업에 자료제출 안내문이 발송됐는지는 알려지지 않은 상태지만 해외에서 가격 담합 행위로 인해 해당국 정부로부터 과징금을 부과받았거나 해당국 구매자 집단(직접 또는 간접구매자 집단, 개별구매자)과의 담합 피해 소송으로 손해배상금 등을 지출한 전력이 있는 다수 기업에 자료제출 안내문을 발송한 것으로 전해졌다.
◆…국세청이 기업들에게 보낸 '독점금지법 위반 관련 자료제출 안내'. 국세청은 해외 불공정 행위로 과징금 및 손해배상금 등 소송비용을 지출한 기업들의 현황을 파악한 뒤 과세 여부를 검토하겠다는 입장이다. 다만 이미 1개 기업에 시범적으로(?) 수 십억원의 과세가 이루어진 상황에서 유사 케이스 기업들에 대한 과세는 사실상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 기업들의 입장이다.
현행 법인세법상 담합 행위 적발로 인해 국내외 공정거래 당국으로부터 부과받은 과징금 및 해당국 법률 위반으로 인해 발생한 크고작은 벌금 등에 대해서는 기업 활동과 관련한 정당한 '비용'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법인세 손금 불산입).
기업들도 현행 법에 따라 국내 또는 국외에서 지출된 과징금 등에 대해서는 법인세 신고시 손금 불산입 처리해 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손해배상금 또는 합의금(민사)을 포함한 '소송비용'.
특히 '클레이턴법(Clayton Antitrust Act)'에 따라 담합 피해에 대한 소비자 집단의 집단소송이 빈번한 미국 시장에서 삼성전자, LG디스플레이, SK하이닉스 등 전자제품 및 반도체 제조 업체들이 수 년 사이 거액의 집단소송에 휘말려, 조 단위에 육박하는 손해배상금과 그에 상응하는 변호사 비용 등을 지출했다.
이 중 일부 기업들이 한국 국세청에 법인세를 신고하면서 이 비용을 법인세 손금에 산입해 왔던 것으로 알려졌고 그동안 이 부분에 대해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국세청이 최근 입장을 수정, 과세를 하겠다는 방침을 정한 것이다.
담합이라는 반사회적 행위로 인해 지출된 이 소송비용을 정상적인 기업활동에 수반되는 비용으로 인정하지 않고 부과제척기간(5년) 내에 관련 비용을 손금으로 산입해 법인세를 신고한 기업들에게 세금을 추징하겠다는 것이다.
최근 기업들에게 발송한 자료제출 안내문은 본격적인 과세를 위한 '현황파악'의 성격인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이에 앞서 국세청은 올해 초 ODD(광디스크드라이브, Optical Disk Drive) 등 광저장장치 시장점유율 세계 1위로 잘 알려진 H사에 대한 세무조사 과정에서 이 부분을 문제삼았고, 미국 현지에서 120억원 가량의 민사합의금을 지출한 후 비용 처리해 법인세를 신고했던 H사에 가산세 등을 합쳐 50억원 가량의 세금을 부과한 것으로 전해졌다.
현재 H사는 국세청 과세에 불복, 김앤장 법률사무소를 대리인으로 선임 조세심판원에 심판청구를 제기한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동안 일부 대기업들은 국세청의 이 같은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으며 국세청이 자료제출 안내문을 발송하는 등 본격적인 과세행보에 나서자 강하게 반발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 대기업의 관계자는 "설마했는데 국세청이 과세의지를 꺾지 않은 것 같다"며 "그동안 문제삼지 않았던 부분을 건드려 가산세까지 합쳐 세금을 부과한다면 기업들 입장에서 어마어마한 타격이다. 국세청과 기업들 사이에 큰 분쟁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현행 법상 이 부분을 손금으로 산입하거나 불산입하라는 명확한 규정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결국 국세청이 논란의 소지가 있는 부분을 과세한 뒤 법적 소송으로 끌고가 과세정당성 여부를 가려보자는 입장으로 알고 있는데, 아무리 세수가 없다고 해도 이는 너무 무리한 시도"라고 지적했다.
국세청 관계자는 "기업들의 재무제표만 보고 우리가 현황파악을 할 수 없다. 기업들에게 안내문을 보낸 것은 선행사건(H사 과세)이 있어서 자료를 받아 현황파악을 하려고 한 것이지 과세를 하겠다고 결정된 것은 아니다"라며 "기업들이 제출한 자료를 받아서 먼저 검토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