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게 뭔 줄 알아? 냄새 한 번 맡아봐"
민원인이 건넨 비타민 음료병에서는 강한 시너 냄새가 났다. 세무서 직원이 "이러시면 안됩니다"라며 만류했지만 세금이 너무 많이 나왔다며 세무서에서 분신자살을 하겠다는 민원인은 막무가내였고 결국 경찰이 출동하는 등 소동이 있고 나서야 상황이 종료됐다.
#2. "내 돈으로 월급 받으면서 일도 제대로 안 해?"
한 민원인은 자신과 원한관계에 있는 이가 운영하는 사업체에 대한 탈세제보와 현금영수증 미발급 신고를했다. 악몽은 그때부터였다. 하루에도 수 차례씩 세무서로 전화가 걸려왔고 급기야 틈나는대로 세무서를 찾아와 세무조사 상황 및 결과 보고를 독촉하기 시작했다. 이 악몽은 무려 5개월이 지속됐고 심지어 자신의 요구사항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며 담당공무원을 직무유기로 고발하기까지 했다.
서비스직, 아르바이트생, 비정규직 등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을'이 갑의 횡포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있지만 사실 '갑'의 횡포는 우리 사회 곳곳, 보이거나 또는 보이지 않는 곳에 녹아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교통사고가 났을 때, 큰소리 치는 사람이 이긴다'는 말을 못 들어본 사람이 없을 정도로 '목소리 큰 사람이 무조건 이긴다'는 인식은 사람들 머릿 속에 뿌리깊게 박혀있다.
백화점, 마트 등 서비스를 제공받는 곳 뿐만 아니라 동사무소, 구청, 세무서 등 관공서도 마찬가지.
국세청에서 '갑오브 갑'인 민원인들을 직접 상대하는 부서인 납세자보호담당 업무나 세무서 민원실, 신고업무가 주된 세무서 개인납세과 등은 국세청 직원들이 기피하는 기피부서 1위가 되어버린지 오래다.
민원인이 부모님 또는 자녀를 거론하거나 욕설, 막말을 쏟아낼 때 그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 민원인의 멱살이라도 부여잡고 싶은 심정이지만 국가의 녹을 먹는 공무원이라는 틀에 둘러싸인 국세공무원들은 강경 대응은 물론, 어디가서 하소연을 하기도 힘든 형편이다.
공복(公僕)이기 때문에 무조건 참아야 한다는 주변 동료들과 상사의 권유는 물론 '내 혈세로 당신들이 월급받고 있다'는 인식 하에 이루어지는 기상천외한 형태의 악성민원인에 대한 인식을 하루 아침에 바꾸기는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더구나 국세공무원들이 연루된 금품비리와 같은 대형 사건이 터지거나 이슈가 있을 때마다 갑의 횡포에 시달리는 국세공무원들은 더욱 작아지며 제 목소리를 내기 힘들어진다.
국세공무원 10명 중 9명 "납세자 상대 너무 괴로워요"
모든 조직은 총괄하는 책임자와 현장에서 실무를 하는 실무자들이 적절히 섞여야 원활하게 돌아가기 마련이다.
특히 국민들의 주머니에서 혈세를 거두는 역할을 하는 국세청의 경우에는 일선 현장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국민들의 경제활동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국세청 업무를 납세자에게 보다 잘 안내하고 도와주는 것이 일선 직원들에게 주어진 임무이기 때문이다.
국세청이 서비스 기관(국세청 영문 표기명 : National Tax Service)임을 자처하는 마당에 대민 접촉의 최전선에서 일하는 일선 직원들은 말 그대로 국세청의 얼굴이며 국세청에 대한 평판을 좌우하는 '바로미터'이다.
하지만 국세공무원 10명 중 9명은 납세자를 상대하는 것이 괴롭다고 말할 정도로 납세자를 직접 상대하는 일에 대한 두려움은 일반인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이다.
◆…"납세자의 '갑질'에 힘겨워 하는 국세공무원" = 지난 4월 국세청 직원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대부분의 국세청 직원들은 납세자를 상대하는 것이 괴로우며 인신공격, 끊임없는 전화 등이 이들을 힘겹게 만드는 것으로 조사됐다.
가장 힘들게 하는 납세자 유형으로는 욕설과 막말 등 '인신공격, 인격모독'이 122명(56%)으로 가장 많았고 '끊임없는 전화'가 72명(33%)으로 그 뒤를 이었다. '육탄공세, 무조건 사무실로 밀고 들어오는 납세자'라고 응답한 직원도 10명(5%)이나 됐다.
이렇게 악성민원에 시달려도 강경하게 대처한다는 응답자는 44명(20%)에 불과했으며 절반이 넘는 112명(52%)은 '친절한 서비스만이 상책'이라고 답했다.
'기타'라고 대답한 62명(28%)은 "일정 선을 넘으면 강경하게 대처한다"거나 "적당히 응대한다"는 등의 답을 내놨다.
"'갑질' 근본원인, 뭐니뭐니 해도 머니(Money)?"
국세공무원들은 악성민원의 가장 큰 원인으로 '돈'을 꼽는다.
백화점 주차장 갑질 논란도 손님의 '나는 VIP 고객'이라는 인식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으며 아파트 경비원에 대한 횡포 사건도 아파트 주민이 경비원의 인건비를 지급한다는 논리에서 문제가 불거진 것만큼 국세공무원에 대한 횡포도 근본원인은 마찬가지다.
국세공무원들과 민원인 사이에 돈을 주고 받을 일이 어디있겠나 싶지만 악성민원을 제기하는 민원인들은 '내가 낸 세금으로 월급을 받으니 내 말을 무조건 들어야 한다'는 인식을 갖고 국세공무원들을 대한다고 입을 모은다.
일반 행정기관들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지만 국세공무원들은 그 민원인이 언급하는 '세금'을 직접 거두는 일을 하다보니 민원인들의 목소리는 더 커진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내가 낸 세금으로 월급받으면서 세금을 이렇게 부과하느냐', 딱 이 구도인 것이다.
조금이라도 강경하게 대응하려고 하면 '공무원이 서민을 잡는다'고 큰소리를 꽥꽥 치거나 국민신문고에 민원을 제기하는 것은 물론 심하면 직무유기로 해당 공무원을 고발하기까지 하는 등 여러 루트로 후폭풍이 밀려오다보니 '그냥 참는 것이 낫다'는 인식이 국세공무원 사이에 퍼져있다.
악성민원인은 민원을 제기해도 제대로 처벌을 받지 않지만 공무원이 잘못 응대했다가는 뒷감당을 하는데 무척 애를 먹을 수 있다. 그래서 울분을 삼켜가며, 꾹꾹 참는 것이다.
심지어 한 용감한 민원인은 서울 모 세무서를 찾아 말도 없이 매일 복사를 100장씩 해가는 것에 대해 해당 세무서 직원이 뭐라고 하자 "내 세금으로 복사해가는 것인데, 무엇이 잘못됐냐"며 일장훈계를 늘어놓고 갔다는 이야기는, 그나마 애교수준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상당수 일선 직원들은 스트레스에 의한 탈모, 환청, 소화장애, 우울증 등에 노출되는 것도 모자라 해당 업무를 기피하는 현상이 일어나면서 국세청 내부 분위기에도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기획취재팀 : 이희정, 이현재, 류성철, 박지환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