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회계감사 피하기 위해 자산규모 축소
제3의 견제세력·강도 높은 처벌 필요해
비상장 회사에 대한 기업공시 기준이 낮아 경영상황을 알리는 중요한 보고서를 공시하지 않거나 부실하게 공시하는 일이 만연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공시기준이 낮은 것을 이용해 일감몰아주기를 통한 이익빼돌리기를 해온 사례도 있어 비상장사에 대한 회계투명성 확보가 시급하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일부 기업은 중소기업을 외부감사 대상에서 제외시켜주는 규정을 악용해 자산규모를 조절하는 편법을 동원해 외부의 감시를 회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비상장사에 대해서도 회계투명성을 높이는 조치가 이뤄져야 한다는 의견과 중소기업에 대해선 부담을 줄여줘야 한다는 견해가 팽팽하게 맞서 논란이 쉽게 가라앉지는 않을 전망이다.
현행 규정은 상장사의 경우 사업보고서를 비롯한 분·반기보고서를 의무적으로 공시해야 하는 반면 비상장사의 경우 일정한 규모 이상이어야 분·반기보고서를 제출하도록 돼 있다. 게다가 결산기말에 실시하는 외부회계감사의 경우도 일정 자산규모 이하는 면제하고 있어 이 같은 문제가 생기고 있다.
□ "비상장사에 대한 외부감사인 선정 기준 허술"
최근 경기침체로 기업의 경영실적이 악화되자 공시의무를 위반하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공시위반 비상장사는 2013년 4개사에서 지난해 38개사로 급격히 증가했다. 이 중 5개사에는 과징금이 부과됐는데 당시 13개사는 사업보고서를 제출하지 않는 등 정기공시 의무를 위반했다.
지난 2011년 이후 공시위반으로 조치를 받은 비상장사는 60개사로 전체 공시위반 회사의 27.9%에 해당된다.
문제는 비상장법인에 대한 공시의무는 상장기업에 비해 현저하게 낮음에도 불구하고 이같이 위반 사례가 많다는 데 있다.
자본시장법은 비상장법인의 경우 증권의 모집·매출 실적이 있거나 주주수가 500인 이상일 때 주주 등 다수의 투자자를 보호하기 위해 사업보고서 제출 등 기본적인 공시의무를 부여하고 있다.
증권을 모집·매출하는 경우 증권신고서 또는 소액공모공시서류 등 발행관련 사항과 회사 경영상태를 파악해 볼 수 있는 자료를 의무적으로 공시해야 한다.
또 주주수가 500인 이상이며 외부감사법인일 때는 발행보고서 외에도 사업보고서와 분·반기보고서를 정기적으로 공시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유상증자나 합병 등 경영 주요사항이 발생해 이사회에서 결의할 때도 투자자들이 판단할 수 있도록 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
회계전문가들은 비상장사의 공시의무 위반사례가 늘어나는 것에 대해 비상장사의 외부감사인 선정기준이 허술한 데도 원인이 있다고 지적한다.
상장사의 경우 외부감사인을 회계법인에만 맡길수 있도록 제한돼 있는 반면 비상장사는 회계법인과 감사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감사반은 공인회계사 3명 이상이면 구성할 수 있어 투명한 회계감사를 진행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지적이다.
회계감사의 선임기간도 상장사의 경우 3년을 유지해야 하지만 비상장사는 제한이 없다. 따라서 회사가 마음에 안 들면 언제든 갈아치울 수 있다.
또 상장사의 경우 한 번 선임된 외부감사인은 동일 기업에 대한 감사가 3년간 제한되나 비상장사는 5년 연속 감사가 가능하고, 1년이 지나면 또 동일 회계사를 선임할 수 있어 입맛에 맞는 외부감사인과의 유착 가능성도 높은 상황이다.
감사인 선임절차도 상장사는 감사인 선임위원회의 승인이 필요하나 비상장사는 내부감사의 승인으로 가능하다.
이처럼 비상장사에는 완화된 법규를 적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마저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 회계투명성이 떨어지고 있다.
□ 300억원 매출회사가 외부감사를 안 받아?
비상장사들의 부실공시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매출이 수백억원대에 달하면서도 아예 외부회계감사조차 받지 않아도 되는 허술한 규정이다. 회계감사를 받지 않으니 당연히 기업정보도 전혀 외부에 공개하지 않는다.
'주식회사의 외부감사에 관한 법률' 시행령 제2조 제1항에 따르면 외부감사를 받아야 하는 회사는 ▲직전년도의 자산총액이 120억원 이상인 주식회사 ▲직전년도의 자산총액이 70억원 이상이면서 부채도 70억원 이상인 주식회사 ▲직전년도의 자산총액이 70억원 이상이면서 종업원이 300명 이상인 주식회사 ▲상장회사 등으로 한정된다.
매출이나 이익에 대한 기준이 없기 때문에 아무리 사업을 크게 벌려도 자산규모만 잘 조절하면 기업정보를 외부에 전혀 공개하지 않아도 된다.
대기업 오너들이 출자한 회사에 일감몰아주기로 이익을 빼돌리는 것도 이러한 허점을 이용해 감시망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오너의 지분율이 높고 계열사 간 거래가 많은 회사의 경우 자산규모를 120억원 이하로 줄여 수백억원의 매출을 계열사로부터 받아도 외부에 알려지지 않게 돼 있다.
자산규모만 줄여 놓으면 계열사로부터 아무리 많은 이익을 얻어도 외부에 공개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모든 비상장사에 공시의무를 부과할 수는 없다"며 "공정거래위원회에서 관련법에 따라 공시하도록 하고 있고, 자산총액이 일정 규모 이상인 비상장회사에 대해서만 '주식회사의 외부감사에 관한 법률'을 제한적으로 적용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자산규모가 작은 중소기업의 경우 '외부감사 수수료 부담' 등 기업부담이 늘어나는데다 이해관계자가 적은 점 등을 고려해 외부감사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금감원의 다른 관계자는 "소규모 회사도 외부감사를 받게 하면 비용부담이 늘어 불만이 쏟아질 것"이라며 "자산규모 120억원의 회사만 하더라도 꽤 소규모인데 외부감사까지 받도록 할 경우 저항이 클 것"이라고 말했다.
현행 법에서 외부감사 대상기업을 자산규모 120억원 이상으로 정한 것도 이 같은 현실을 반영해 금융위원회에서 100억원을 120억원으로 상향 조정한 결과다. 이처럼 자산의 규모가 작은 기업들은 공시와 외부 감사를 규제로 인식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따라 관련 법규가 미치지 못 하는 비상장사의 불투명한 회계는 심각한 수준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기업의 인식전환이 최우선…견제세력 필요
비상장사들의 불투명한 회계가 반복되는 데는 기업들의 인식 자체가 문제라는 분석이 주를 이루고 있다.
한국공인회계사회 관계자는 "분식회계와 투명경영은 종이 한 장 차이일 수도 있다"며 "망해가는 기업을 살리기 위해서는 불투명한 회계처리를 할 수밖에 없는 데 원인이 있다"고 지적했다.
금감원 관계자는 "경남기업처럼 기업 활동을 하면서 비자금을 조성하는 유혹에 빠지는 것이 문제"라며 "정확한 회계 작성과 관련해 우리의 기업 문화가 선진국보다 미숙하다"고 말했다.
그는 "피감사 기업이 외부감사인을 직접 선임하는 관행도 엄격한 감사를 어렵게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비상장사의 불투명한 회계를 바로 잡기 위해서는 기업 스스로 인식을 전환하는게 최우선이라고 강조한다.
금감원 관계자는 "회계제도면에서는 외국보다 규정이 잘 마련돼 있지만 세금을 줄이려는 기업의 의도적 회피 때문에 불투명하게 회계 처리를 하는 것"이라며 "기업의 마인드가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강조했다.
그는 불투명한 회계를 일삼는 기업과 외부 감사인에 대해서는 강도 높은 처벌이 뒤따라야 한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비상장사들의 회계를 직접 들여다보는 견제세력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회계사회 관계자는 "비상장사 중 매출액이 크거나 이해관계자가 많은 기업은 회계 처리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보완책이 있어야 한다"며 "경영인도 감사인도 아닌 제3의 세력이 이들을 견제할 수 있도록 제도가 구축돼야 한다"고 말했다.
또 "정확한 회계정보가 작성될 수 있도록 기업 내부 감사인이나 회계감사를 맡고 있는 외부 감사인들도 본인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