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한국문연
시어와 문장에 사회 곳곳이 녹아있고 시인의 삶이 스며들어 있다. 하루하루 애쓰는 우리네 일상의 결도 한껏 드러난다. 자신이 달려온 길을 돌아보며 솔직하게 읊조리는 고백에 겸허한 마음이 깃든다. 숨 가쁘게 흘러가는 현실 속에 스쳐 지나가기 마련인 주변도 한 획 두 획 정성스레 메모돼 곱씹을 수 있도록 피어오른다.
편집부 기자로 활약하다 2009년 '시에'로 등단한 김홍조 시인이 시집 '살바도르 달리 표 상상력 공장소'를 펴냈다. '비에 젖은 빗소리가 저릿저릿한 슬픔의 음표로 걸어온다면' 가을을 느꼈던 시인은 달동네 언덕 봉천고개 하늘카페에서 낮술을 즐기며 해방감을 얻었고 '소중한 사람 귀하게 여길 줄 아는 건강한 마음'을 기증받길 소원했다.
뇌에 산소를 공급하던 혈관이 문제를 제기했다/ 오래전부터 상황을 지켜보던 왼쪽 눈이 재빨리 동조하고 경고 막을 쳤다/ 중심망막정맥혈관폐쇄라는 플래카드가 내걸렸다/ 사람들은 눈으로 풍이 왔다고 수군댔다/한 달도 안 돼 한 쪽 다리가 말을 안 듣기 시작했다/(중략) 웬 횡재냐 싶었다, 이제부터는/ 좋아하는 바흐-부조니를 질리도록 듣고/ 화성에서 자라는 꽃의 향기를 하루 종일 상상하는('뇌경색' 부분)
갑자기 찾아온 병마를 털어놓으면서도 흔들리지 않은 채 덤덤하게 받아들인 시인은,
출근길 사람들 빨려 들어가는 상계역 입구/ 앓고 난 뒤 머리 묶고 일어나 앉은 것처럼/ 길가 모서리 단정한 여자의 뒷모습/ 울고 있는지/ 어깨가 들먹인다/(중략) 위로가 필요한 사람이 어디 그대뿐이랴/ 새벽부터 대낮까지 만 오천 원 번 택시 기사/ 주차위반 사만 원 딱지에 진저리 치고/ 국밥 한 그릇 뚝딱 말아먹기 위해/ 일생의 긴 줄 서 있는 노숙인 행렬을 보라('수선화를 위하여' 부분)
세상 구석구석 흐르는 삶들을 붙잡아 노래했다. 쉽게 눈에 띄지 않는, 그러나 각자가 소중하지 않을리 만무한 삶들을 울지 마라 위로한다.
봉천동 재래시장 '신발 많원' 집/ 간판에 둥지 튼 히읗 하나 염치없는/ 발칙한 동거지만/ 이 공간에서 당장 쫓겨날 일은 없다/ 재개발이 없는 한/ 주인의 호가는 언제나 많원일 테니까/(중략) 길 가는 행인들도 무심히 유쾌할 뿐/ 자기 눈이 전염됐다는 사람은 없다/ 오직/ 도시를 리디자인하려는 높은 이에게만/ 눈엣가시라/ 온갖 미디어 동원해/ 많원은 돈이 되지 않아/ 지역 발전을 이룰 수 없다며, 어르고('만 원과 많원 사이' 부분)
한 장에 6원 50전 하던 연탄 못 사/ 웃풍 매서워도 불구멍 막고 살았더랬어요/ 연탄은행 생겨 하루 3장 나눠 주지만 아까워 못 때고/ 재개발 바람 불어 춥기는 매한가지/ 철거 시작되면 이제 또/ 어디로 가야 하나요/ 인생의 종점에서 돌아보자고/ 작심하고 들어온 산비탈인데/ 마을 입구 종점의 마지막 버스 출발하듯/ 그렇게 떠나야만 하는 걸까요('백사마을' 부분)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 치인 사회 한 켠도 보듬는 듯 시인은 기록했다. 화려하게 탈바꿈할 미래만 기대하는 군상에 경종을 울리려는 기세에 새로운 관심을 갖게 만든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그저 모른 채 해왔던 인식을 부끄럽게 하려는 듯.
시인은 자신의 삶의 주인이 스스로였나 흔들릴 때마다 유무형의 그리움을 불러내 시의 피와 눈물을 종이 위에 쏟아냈다. 말 달려온 길을 돌아보며 뒤처진 자기 영혼을 기다리던 늙은 아메리카 인디언을 페르소나로 여기며 섬세하게 자신을, 세상을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살바도르 달리 표 상상력 공작소 / 김홍조 지음 / 1만원 / 한국문연 펴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