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 기운 서린 산천단~관음사~새미오름…올레장에선 "지꺼져요"

역사 숨결 배인 아름답고 슬픈 길

제주의 오름은 설문대 할망이 한라산을 만들기 위해 치마폭에 싸서 나르던 돌들이 떨어져 이뤄졌다는 설이 전해온다.

그렇게 만들어진 368개의 오름을 안고 있는 제주는 오늘날 전 세계 어디에도 없는  트레킹 여행자들의 꿈길이 되고 있다. 오름마다 특색이 있고 불리는 이름마다 사연이 담겨 있다.

하지만 제주도민들에게 이 땅이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고려 때 100여 년간은 몽골의 지배를 받았으며 탐관오리들의 착취와 무거운 세금에 살던 터를 버리고 제주를 떠나야 했던 시대가 있었다. 당시 도민의 수가 줄자 중앙 정부는 법으로 섬을 떠나지 못하게 막았으며 중죄인들을 유배 보내기도 했다.

다시 일제 강점기에는 집안에 쇠붙이 하나 없을 정도로 재산을 빼앗기고 많은 사람들이 강제 징용에 끌려가 목숨을 잃었다. 일본이 폐망 직전 수많은 진지를 구축하고 최후의 전투를 준비한 오름마다 아픈 상처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 만약 나가사키에 핵폭탄이 투하되지 않고 천황이 무조건 항복을 외치지 않았다면 지금 제주도의 오름은 다 사라지고 없었을 것이다.
 
'살다보면 살아질 거라'는 제주 어머니들의 말을 떠올리며 아픈 역사를 간직한 아름답고 슬픈 길을 따라 걸어보자.

아라동 산천단을 출발해 솟은오름과 진지동굴을 지나 관음사에서 다시 새미오름을 오르고 5.16도로로 나오는 길. 넉넉잡아 6시간이면 충분하다.

산신제 지내던 산천단

예부터 제주도에 부임한 목사(지금의 도지사)는 한라산에서 신령에게 제사를 지내던 풍속이 있었다. 그런데 추운 겨울 산 정상에서 산신제를 지내다보면 종종 얼어 죽거나  사고사를 당하는 수가 있었다. 이에 성종 때 부임한 이약동 목사는 한라산 가까운 곳에 제단을 만들어 산신제를 지내도록 했다고 한다.

지금의 아라동에 위치한 산천단은 백성들의 고통을 헤아리고 한 해의 무사안녕을 비는 제사를 지낸 의미 있는 곳이다.
 

이곳에는 나이가 500∼600년 된 제주곰솔 8그루가 숲을 이루고 웅장한 기세를 뽐내고 있다. 지금은 긴 가지를 버팀목에 의지하고 있지만 오랜 세월 비바람을 이겨낸 지조 높은 제주의 충신들이다. 

“초 값 내면 고양이가 자리 비켜준다”

산천단을 돌아 나오면 5.16도로가 나온다. 5.16 당시 많은 죄수들이 이 도로를 만드는 데 투입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도로를 걷기 힘들면 버스를 타고 별빛누리공원 입구에 내려 구암굴사를 향해 걸음을 옮겨보자. 이 길은 제주불교 순례길로도 알려져 있는데 굴 속 암자에는 도민들의 소원이 담긴 초들이 불을 밝히고 있다.

이 소원 초를 파는 것은 사람이 아닌 고양이라고 한다. 초 값을 내면 고양이가 자리를 비켜준다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구암굴사를 지나면 자그마한 오름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편백나무숲길로 이어지는 이 오름은 소산봉이라 불리는 솟은오름이다. 처음 시작점인 산천단이 바로 솟은오름의 기슭에 앉아있는 것이다.

고려 예종 때 송나라 호종단이 제주 명산의 혈을 찌르고 떠나던 날 갑자기 솟아나 한라산의 기운이 절대 다하지 않았다는 것을 드러냈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오름이다. 소산은 솟았다는 말로 '갑자기 솟아오른 오름'이란 뜻으로 불려졌으나 나중에 한자어 표기로 바뀌어 소산오름이라 불리고 있다.

숲길에 마련된 쉼터에 앉아 잠시 쉬면서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명상을 해도 좋은 곳이다. 숲에서 선물로 주는 향은 감사의 마음을 일깨워준다.

진지동굴, 칼다리 폭포와 관음사

다시 짐을 꾸리고 십여 분 걷다보면 신비한 진지동굴이 나오고 더 가면 칼다리 폭포가 모습을 드러낸다. 비가 많이 온 뒤에는 깎은 듯한 절벽 아래로 폭포가 생기지만 평상시에는 칼로 자른 듯한 절벽만 볼 수 있다.

이곳을 기점으로 두 갈래 길이 나온다. 제주어로 숲길이라는 고지길과 냇가 길을 뜻하는 내창길이 나온다. 어디를 선택할 것인가는 그날 상황에 따르면 된다. 걷기 쉬운 길과 어려운 길. 들어설 때는 내창길을 선택해 관음사를 보고, 나올 때는 고지길을 걸어보는 것도 괜찮다.

내창길을 따라 걷다보면 노루가 먹고 살았다는 노루물과 신령바위가 나온다. 좀 더 걷다보면 관음사의 주황색 지붕이 눈에 들어온다. 제주와 어울리지 않는 지붕 색이 조금 어색하기는 하지만 주변 경관과 매치가 잘 되는 절 입구 좌불상들에게는 눈길이 절로 간다.

관광객들도 많이 찾는 고사리 평원

오던 길을 다시 돌아 고지길인 숲길을 걸어서 새미오름으로 향해보자. 가는 길에 고사리 평원이 나온다. 고사리 평원은 이제 도민뿐 아니라 관광객들도 함께 찾아 고사리를 꺾는 유명 관광지가 됐다.

매년 4월이면 제주의 며느리들은 바쁘다. 일년 내내 제사상에 오를 고사리를 꺾어 삶아서 말려둬야 하기 때문이다. 고사리 철에는 가는 빗줄기가 며칠을 내리기도 한다. 이를 제주 사람들은 고사리 장마라 부른다. 이 장마가 지나고 나면 제주 전역에 고사리가 고개를 들고 일어서기 때문이다. 공원이나 보호지역이 아닌 곳에서는 얼마든지 고사리를 꺾어도 상관이 없다.

새미오름은 삼의오름 혹은 삼의악으로도 표기된다. 이는 일제 때의 잘못된 표기 중 하나다. 샘이 있어 새미오름이라 불렸는데 오름 정상에 제주어로 굼부리인 분화구가 있고 굼부리는 수풀로 우거져 있으며, 한 편에 무덤들이 있다. 그 안쪽에 샘이 솟아나고 있다.

오름 정상에 서면 제주시가 한 눈에 들어온다. 긴 여정에 환호라도 불러야 할 것 같다.

금요일 오후의 아라 올레장 어때요?

여행의 묘미 중 하나가 낯설음이다. 제주의 오름 정상에서 바라보는 시가지는 바로 그 낯설음이다. 숲길을 지나고 바위와 작은 풀꽃들을 만나고 또 나무 뿌리에 앉은 이끼와 줄기를 타고 오르는 넝쿨은 삶의 강한 의지를 말해주고 있다. 멀리 보이는 시가지는 회색의 정지된 신호같은 느낌마저 들게 한다.

자신이 서 있는 그곳을 떠나와 잠시 그곳을 다른 시선으로 볼 수 있게 함도 여행의 덤인 것 같다.

내려오는 길을 경찰사격장 입구가 있는 5.16 도로 방향으로 향하면 버스 정류장이 나타난다.

만약 여행하는 날이 금요일이라면 버스를 타고 아라 올레장에서 내려 보자. 금요일 오후 아라동은 제주 말로 '지꺼진다'. 즐겁다는 이야기다. 4시부터 8시까지 열리는 올레지꺼진장에서는 먹거리와 여러 가지 수공예품을 팔고 있는 문화 장터가 선다.

이렇듯 제주도에 이주해온 많은 문화 예술인들이 주축이 되어 작은 장을 만들고 소통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여기저기서 형성되는 벼룩시장은 이주민들과 현지인들이 함께 어울리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제주도의 새로운 문화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대나무에 마디가 있는 것은 바람에 꺾이지 않게 한 번 쉬어가는 거라고 한다. 하물며 사람은 오죽할까? 일 주일에 한 번은 쉬라고 만든 창조주의 뜻에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여행에 꼭 필요한 것이 있다면 용기와 겸손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일 것이다.

멍게비빔밥의 상춘재와 제주대 게스트하우스

1. 청와대 요리사를 지냈다는 상춘재 주인장의 멍게비빔밥과 추어탕은 봄을 유혹하는 맛이다. 상큼한 바다와 봄의 향을 비벼 한 입에 쏙 넣어 보는 맛이랄까? 문어비빔밥도 많은 사람들이 즐겨먹는다. 제주도에서 비빔밥을 제일 잘 만드는 집이라는 소문이 난 곳이다.

2. 제주대학교 게스트하우스는 유명하다. 국립대이니만큼 학생들이나 교수들에게 개방하고 있으며 대학 홈페이지를 통해 예약이 가능하다. 싸고 저렴하며 조리도 가능한 부엌도 마련되어 있다.

이경화 칼럼니스트(제주시대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