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부속명세서 공시의무 없애 '부실공시' 조장
금감원, 기업편에서 재무제표 작성지침 개정 '빈번'
기업투명성 후퇴…소액투자자 이익은 갈수록 무시
기업 회계기준의 투명성이 갈수록 후퇴하고 있다. 기업 감시의 창이었던 부속명세서가 기업 공시 내용에서 삭제되면서 공시 자체가 부실해졌다. 게다가 K-IFRS(한국채택국제회계기준) 도입으로 정기보고서 제출을 면제받은 기업이 늘어나 회계부정을 부추기는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
자본시장의 건전한 육성을 위해 주주와 투자자 보호를 하겠다는 정부의 정책기조에도 역행하고 있는 것이다.
투자자들은 금융감독원이 재무제표 작성지침을 기업 오너인 대주주에 유리한 방향으로 재편하고 있다며 볼멘소리를 내고 있다. 당국이 기업회계기준을 바꿀 때마다 기업이 공시하는 재무제표 등으로 기업의 경영상태를 파악하기가 더욱 어렵게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감시망이 소홀해져 기업이 경영내용을 감출 수 있는 여지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투자자들의 입장에선 투자금이 손쉽게 기업 오너의 주머니로 흘러들어갈 수 있다며 불만이다.
■ 2004년부터 부속명세서 삭제···'깜깜이' 기업 공시
회계전문가들은 지난 2004년부터 재무제표에서 부속명세서를 제외시킨 이후 기업 경영상태를 면밀하게 분석해보는 것이 불가능해졌다고 평가하고 있다. 기업 경영에서 한 발 물러나 있는 주주나 투자자들이 기업 경영 상태를 보다 깊이 있게 들여다볼 수 있는 참고자료인 부속명세서를 볼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부속명세서는 매출원가명세서, 제조원가명세서, 예금등명세서, 유가증권명세서, 재고자산명세서, 주요채권명세서, 단기차입금명세서, 주요채무명세서, 장기차입금명세서, 사채명세서, 감가상각비등명세서, 법인세비용명세서 등 크게 11개 항목을 담고 있다.
삼성전자의 2003년도 사업보고서를 예로 들어보자. 부속명세서 내 제조원가명세서에는 재료비, 노무비, 경비, 당기총제조비율, 기초재공품원가 등이 항목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다.
재료비 항목만 보더라도 기초재료재고액, 당기재료재고액, 기말재료재고액 등이 낱낱이 공개돼 한눈에 삼성전자의 1년간 재료비 증감 내역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현행 규정은 재료비 등 제조원가를 총액만 적도록 하고 있어 부문별, 공정진행별 재료비 사용내역을 알 수 없도록 하고 있다.
회계전문가들은 이렇게 느슨해진 틈을 이용해 분식회계가 이뤄질 가능성이 높아지게 된다고 지적한다. 더욱이 재고자산의 평가를 회사가 필요할 때 임의로 할 수 있어 장부에 적힌 재료비가 작년의 시가인지 올해의 시가인지도 알 수 없게 돼버렸다.
부속명세서의 다른 큰 항목인 예금등명세서, 유가증권명세서, 재고자산명세서, 장·단기차입금명세서, 주요채무명세서, 사채명세서에는 삼성전자가 보유한 채권·채무 관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이 항목은 회사의 건실함과 시장 대응력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주주·투자자가 투자할 때 반드시 확인하는 부분이다.
예금등명세서와 주요채권명세서에는 금융기관명과 잔액, 예상되는 수익 등이 나타나 있고, 유가증권 명세서에는 종목, 액면가액, 주수, 취득원가 등을 확인할 수 있다. 반대로 삼성전자의 '빚'은 장·단기차입금명세서, 주요채무명세서, 사채명세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외 감가상각비의 경우 기업이 자의적으로 회계·세무 내역을 조작할 수 있는 것이어서 '요주의 사항'으로 분류될 수 있다. 계산방법이 복잡한데다 자산별로 기업이 자의적으로 감가상각 기간을 선택해 상각비용을 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속명세서가 존재하던 2003년까지는 감가상비등명세서를 통해 토지, 건축, 건설 중인 자산, 기계장치, 공구기구비품, 차량운반구 등 유형자산과 영업권, 산업재산권 등 무형자산의 취득원가 및 당기상각액, 상각액누계, 기말잔액을 상세하게 확인해 볼 수 있었다. 그런 만큼 기업이 자의적으로 상각기준을 바꾸는 편법으로 회계부정을 저지르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2004년부터 부속명세서가 삭제되면서 감가상각비의 세부 내용을 확인할 길이 끊겨 버렸다. 현행 재무제표에는 이들 항목이 '감가상각비' 총액으로만 표시돼 어떤 부분이 얼마만큼 상각됐는지 확인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법인세 항목도 마찬가지다. 현행 제무재표의 법인세 비용은 이연법인세, 이월결손금, 분할납부 법인세 등이 모두 포괄적으로 기재돼 그 회사가 당기 소득에 대해 발생한 법인세와 실제 납부한 법인세가 얼마인지 세무조정계산서를 따로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 수 없게 돼있다.
국세청 관계자는 "재무제표의 감가상각비와 법인세 관련 항목은 기업의 임의선택권이 높다"며 "때문에 '검은 돈'을 조성하는 수단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 K-IFRS 연결재무제표 뒤에 숨어 실적 조작 가능성
설상가상으로 K-IFRS 적용으로 연결재무제표를 작성하도록 함에 따라 '물타기 식'으로 기업경영실적을 조작할 수 있게돼 기업의 투명성은 더욱 악화되고 있다.
K-IFRS는 종속기업의 실적까지 포함한 실적이기 때문에 개별회사의 실적을 분리해 파악하기 힘들다는 맹점이 있다. 더군다나 최근에는 K-IFRS를 적용하는 기업이 주요종속회사에 대한 정보를 밝힐 의무의 면제 범위가 넓어졌다.
지난 2월 9일 개정된 금감원의 재무제표 공시지침 3-1-1조(회사의 개요)에 의하면 연결재무제표를 작성하는 상장법인이 기재해야 할 주요종속회사의 범위는 직전 사업연도 개별재무제표상 자산총액 500억원 이상에서 750억원 이상으로 폭이 확대됐다.
이러한 기준은 제6장 이사가 의무적으로 경영진단 및 분석의견을 기재해야 하는 회사의 범위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요약연결재무정보가 정확한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조차 마련돼 있지 않은 것도 문제다. 기존에는 ▲연결대상회사의 변동내용 ▲투자자가 요약연결재무정보 비교 시 오해할 수 있는 중요한 사항에 대해 의무적으로 기재해야 했지만, 개정안에서는 이 항목이 삭제됐다.
또 이사·감사 등 고액연봉 임원의 보수현황은 계산방식을 추가하는 방법으로 바뀌었지만, 부속명세서가 사라져 보수지급 금액의 정당성을 평가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개정지침을 보면 기업의 자체적 계산법인 '계량지표'를 사용해 금액을 산출한다는 내용이 장황하게 설명돼 있을 뿐 주주나 투자자가 계산법이 정당한 지 확인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회계 전문가들은 "기업들이 이러한 자율성을 악용해 실적을 부풀리거나 세금을 회피할 수 있는 여지가 커졌다"고 지적하고 있다.
■ 금감원, 2년간 책임회피성 기업공시지침 20회 개정
2013년도와 2014년 불과 2년 사이 금감원의 기업의무 공시지침은 20여회나 개정됐다. 그 동안 투자설명서에 투자 위험을 나타내는 경고 문구 삽입 등 투자자에게 위험부담을 떠넘기는 많은 조문이 신설됐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그간 투자자 보호 측면이나 신종증권의 도입 시 공시의 필요성에 따라 추가적인 변경이 있었지만, 공시의 기본적인 큰 틀에서 항목 조정은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금감원의 공시지침 개정은 겉으로는 주주와 투자자를 위하는 듯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주주와 투자자들을 소외시키고 당국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대형 회계법인 회계사는 "최근 기업회계 작성지침은 주주, 투자자, 소비자, 직원 등 약자에게 기업 정보를 은폐하는 방향으로 변질되고 있다"며 "금감원이 기업의 이익을 대변하는 기관인지 의문스럽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