④차명거래 금지법 시행 첫날, 분주한 '큰손'들

서울 강남의 부촌으로 꼽히는 대치동 사거리 앞.

이곳에는 수많은 고액 자산가들을 손님으로 모시는 대형은행과 증권사의 VVIP PB(very very important person private banking) 센터들이 줄지어 서있다.

이곳 PB센터를 드나드는 고객들 중 상당수는 대기업 임원이나 중소기업 CEO, 병원장, 개인사업가 등 고액 자산가들이다. 이들이 PB센터에 맡기는 돈은 적게는 수억에서 많게는 수백억에 달하기도 한다.

최근 1년 사이 PB센터에는 이들 고액 자산가의 문의가 빗발치고 있다. 지난달 29일 첫 시행된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 개정안, 일명 '차명거래 금지법' 때문이다.

차명거래 금지법의 당초 취지가 대기업이나 정치인의 불법 자금 은닉을 막기 위한 것이지만, 그동안 절세를 위해 차명계좌를 종종 이용해온 일반인에게까지 그 여파가 확산되고 있다.

한 PB센터 팀장은 "박근혜 정부 출범 후 차명거래 금지법에 대한 논의가 매스컴을 통해 전해지면서 이미 이곳 PB 고객들의 움직임은 분주해졌다"고 전했다. 그는 2000년대 초반 PB센터의 등장 이후 줄곧 강남 부유층의 자산관리를 맡아왔다.

□ "자녀 명의로 넣어둔 1억원 부랴부랴 인출" = "부자들이 가장 예민한 부분이 바로 '세금'이다. 액수가 크든 적든 합법적 선에서 아낄 수 있다면 아끼려고 하는 것이 당연한 관행이다."

시중은행 PB는 "예컨대 20세 이상 자녀의 명의로 5000만원까지 증여하는 것은 면세 범위에 해당하는데, 1억원을 맡겨놓으면 증여세 400만원을 내야 한다. 적지 않은 금액이기 때문에 당연히 증여 신고를 안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밝혔다.

증여 면제 범위는 최근 10년 동안 배우자 6억원, 자녀의 경우 성년 5000만원, 미성년 2000만원, 부모 3000만원씩 허용된다.

이 PB에 따르면 최근 자산 30억원 정도를 보유한 병원장 부인은 아들 명의의 차명계좌에서 1억원을 인출해 본인 명의로 전환했다.

차명거래 금지법이 시행되기 전이라면 이 1억원이 문제되지 않을 수 있지만, 추후 이 돈을 아들에게 증여할 경우 가산세까지 물게 될 위험이 있다는 것이 PB의 설명.

그는 "PB센터 고객들 대부분이 부인과 자녀 명의로 예금을 분산시키기 때문에 이번 차명거래 금지법과 연관이 있다. 법 개정 전에는 문의가 상당히 많았는데 점차 줄어들고 있는 추세"라고 말했다.

차명거래가 적발되면 5년 이하의 징역이나 5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받을 수 있다. 개정법 시행 이후 불법 차명계좌를 보유했더라도 뒤늦게 해지하는 것은 문제되지 않을 수 있다.

당국은 기존의 차명계좌를 해지해 불법거래를 단절하는 것에 대해 처벌 대상으로 보지 않으나 과거의 금융소득종합과세 누락분이 일시에 과세될 수 있다.

또한 단순히 예금을 찾는 것이 당국의 추적을 피할 수 있는 길은 아니다. 만일 거액 예금을 인출했다가 추후 이 자금을 다시 예치해 금융소득이 갑자기 늘어날 경우 국세청으로부터 자금 출처 조사를 받을 가능성이 남기 때문이다.

섣불리 예금을 인출했다가 자칫 과세당국에 정보가 노출될 수도 있다. 현행법상 2000만원 이상 현금을 인출하면 거래자 정보가 금융정보분석원(FIU)에 자동으로 보고된다.

개정법 시행 후 예금이자를 챙기기 위해 만기까지 차명계좌를 유지하는 것 역시 위험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불가피한 문제로 그동안 차명계좌를 없애지 못했던 사람이 법 시행 이후라도 서둘러 차명거래를 끊었다면 처벌하지 않는다는 의미이지만, 이자 때문에 만기까지 차명계좌를 해지하지 않는 것은 문제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

□ "금융소득종합과세, 세금 정당하게 내세요" = "비록 세금에 민감하긴 하지만, 대부분의 고객들이 탈세나 위법행위까지 감행할 만큼 무리한 시도를 하지는 않는 것 같다. 형사처분까지 받게 된다고 하니 웬만하면 법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세금을 아끼고 정상적인 절차를 밟으려고 하는 분위기다."

신동일 KB국민은행 대치PB센터 VVIP 자산관리팀장은 "만약 의도적으로 세금을 피하려거나 탈세 계획이 있는 경우 PB센터에서도 이를 알기 어려울 것이다. 실제로 PB센터의 분위기는 생각보다 차분한 편이다"고 전했다.

신 팀장은 "증여세의 경우 그동안 증여 신고를 안해도 법적으로 문제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녀 명의로 분산시키는 경우가 있었다. 최근 이에 대해 문의가 많았는데, 되도록이면 증여 신고를 하도록 안내하고 있으며 많은 고객들이 사회적 분위기에 공감하는 모습이다"고 설명했다.

또 한 가지 고액 자산가들을 불안에 떨게 하는 것이 금융소득종합과세이다. 현행 소득세법에 따르면 한 해 이자와 배당이 2000만원 이상 발생하는 경우 낮은 세율의 분리과세 대신 최고세율 41.8%의 종합과세를 적용 받는다.

금융소득이 2000만원 이상이려면 예금을 가정해 기준금리 2%를 적용할 때 자산이 최소 10억원이어야 한다.

KB국민은행에 PB센터에 따르면 고객들이 평균적으로 맡기는 금액이 5억원~10억원 정도이다. 보통은 3곳 안팎에서 나눠 자산관리를 하기 때문에 전체 자산을 15억원~30억원 수준으로 추정하고 있다. PB 고객의 경우 상당수가 대부분이 해당된다.

이관석 신한은행 자산관리솔루션부 팀장은 "예전에는 15~20억 정도의 자산가들이 금융소득종합과세 대상자가 됐지만, 올해부터 금융소득 기준 금액이 4000만원에서 2000만원으로 낮아져 10억원만 있어도 내년에는 종합과세 대상자가 된다. 50억원 이상 고액 자산가들뿐 아니라 PB센터의 문의가 많았다"고 설명했다.

이 팀장은 "원칙대로 세금을 내고 떳떳한 종잣돈을 만들어 정당한 방법을 통해 자산을 불려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데 고객들이 동의하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새 금융실명법은 차명계좌를 방조한 금융회사 직원에게도 처벌을 내리기 때문에 은행원들도 꼼꼼하게 설명하고 있다"고 밝혔다.

□ "인출한 돈 어디에 맡기지?" = 물론 모든 자산가들이 같은 것은 아니다. 일부는 5만원권을 이용해 거액을 인출하거나 골드바(gold bar)를 매입하거나 비과세 보험 상품에 가입하기도 한다.

시중은행 PB팀장은 "차명계좌 돈을 5만원권으로 교환하거나 환금성이 높은 골드바를 구매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고 밝혔다.

인터넷쇼핑몰 옥션에서는 지난 8월 이후 3개월 동안의 개인금고 판매량이 1년 사이 같은 기간과 비교할 때 25% 증가했다. 옥션의 개인금고 매출 증가율은 지난해까지 평균 10~15% 선이다.

보험 업계에서는 보험 상품의 경우 차명거래 금지 대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보험 가입을 유도하고 있다. 단, 보험 역시 차명인 것이 밝혀지면 증여로 간주해 증여세를 내야 한다.

한편 지난 1일부터 중국 위안화 직거래시장이 열리면서 금융 업계는 위안화 상품의 홍보 경쟁이 치열하다.

시중은행 PB는 "저금리와 주식시장 불안으로 인해 많은 자산가들이 위안화 예금을 대안 상품으로 찾고 있다"고 설명했다.

손병두 금융위원회 금융서비스국장은 "제도가 바뀌며 국민들이 막연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조금 과장된 측면이 있다"며 "법 개정의 취지가 명백한 불법자들을 처벌하기 위한 것이고 대다수 선량한 예금주들은 해당이 안된다는 사실을 알아달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