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29일부터 시행되는 금융실명법 개정안의 파장이 거세다. 일부 예외를 제외한 차명거래에 대해 처벌이 강화될 뿐 아니라 합법적인 차명계좌라도 세금회피 의심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같은 불확실성으로 인해 금융회사 창구에는 무연일 문의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불법 차명거래에 해당하는 항목은 정확히 어떤 것이고, 어떤 처벌을 받게 될까. 이번 법 개정은 대기업이나 정치인의 불법 자금, 은닉 재산을 찾아내 탈세를 차단하는 것이 당초의 취지였으나 여파 자체는 일반인에게까지 확산되고 있다.
□ 선량한 목적의 차명계좌는 합법= 고액 자산가, 현금 거래가 많은 자영업자 등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그동안 합의에 의해 이뤄진 차명거래도 전면금지되고 최악의 경우 형사처벌까지 내려질 방침이다.
개정 금융실명법은 차명계좌의 주인과 명의를 빌려준 사람 모두에게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을 내릴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재산 은닉, 조세 포탈 등 자금세탁, 채권자의 강제 추심을 피하기 위한 타인 계좌 예금 등 대부분 종류의 차명거래가 불법에 해당된다. 또한 세금우대 금융상품에 가입하고 한도 제한을 피하기 위해 타인 명의 계좌에 예금해도 불법이다.
다만 일반인들이 개설하는 차명계좌는 부분적으로 허용된다. 여기서 일반인이란 재산 은닉의 목적 없이 선의의 차명거래를 하는 예금주이다.
선의의 차명거래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다. 계, 동창회, 부녀회 등 친목모임의 임원을 맡아 회비를 관리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또 문중, 교회 등 단체의 자산을 관리하는 것 역시 차명계좌가 허용된다.
하지만 선의의 차명거래의 의미를 두고 범위가 모호해 금융권에서 혼선이 빚어지기도 한다.
금융권 협회가 배포한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증여세 납부 회피를 위해 감면 범위를 초과하고 가족 명의 계좌에 예금하는 행위는 조세포탈에 해당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따라서 가족 간에 명의를 분산할 때에는 증여세 감면 범위를 지키도록 유의하고, 증여할 목적의 차명계좌는 확실하게 증여 신고를 해야 한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단순히 면제 금액만 기준으로 불법 여부를 판단하면 실제 증여할 목적으로 예금하는 것이 불법이 되고, 면제 한도를 지키면 타인에게 증여할 생각이 없는 차명계좌라도 합법이 되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 선의의 차명계좌, 세금회피 의심 가능해= 문제는 이 같은 선의의 차명계좌가 증여세나 금융소득 종합과세 회피를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의심 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가족 차명계좌는 통상 예금 보호나 세금 절감의 목적인 경우가 많다. 현행 예금자보호법은 은행 파산 시 5000만원 이하의 예금에 한해 보장하기 때문에 가족 명의로 분산시켜 예금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현행법상 증여세 면제는 최근 10년 동안 배우자에게 최대 6억원, 자녀에게 5000만원(미성년자 2000만원), 부모에게 3000만원, 친족에게 500만원까지 허용한다.
예를 들어 10억원을 보유한 사람이 아내 이름으로 6억원, 성인 두 자녀의 이름으로 5000만원씩, 부모님 명의로 3000만원씩 예금하고 남은 2억4000만원을 자신 명의 계좌에 예금하는 것은 합법이다.
앞으로는 이렇게 세금을 줄이려는 목적으로 증여 공제 한도 이상을 정식 신고하지 않고 가족 차명계좌에 예금하면 불법으로 간주한다.
60세 이상 고령자들은 생계형 저축과 세금우대 종합저축으로 총 6000만원까지 가입이 가능하지만, 자녀가 세금을 아끼려고 부모 증여 공제액인 3000만원을 넘는 6000만원을 맡기면 불법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지난해 금융소득 종합과세 기준이 1인당 이자 4000만원에서 2000만원으로 낮아지면서 이를 피하기 위해 가족 차명계좌를 활용하는 사례가 많아졌다.
시중은행 영업점 관계자는 "자산이 많은 고객이 종합과세를 피하기 위해 자녀뿐 아니라 친척, 조카 명의의 차명계좌까지 만들었다가 부랴부랴 인출하는 상황이다"고 했다. 그는 또 "아직 지켜보는 고객도 있는 만큼 향후 예금 인출 현상이 더 심각해질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타인 명의로 금융거래하는 사람이 줄어드는 면은 긍정적인 효과가 있지만 '증거'가 남는 금융거래를 아예 하지 않겠다는 사람이 늘 경우 오히려 지하경제를 확대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김우철 서울시립대 교수는 "선의와 악의를 구분하는 것은 어렵다. 수사 사건의 성격이나 인지 여부에 따라 달리지겠지만, 만일 범죄를 목적으로 하는 차명거래일 경우 금액이 적을 리 없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금융실명법 개정이 지하경제 규모를 줄이는 데 일조하리라 생각하지만 실효성 있게 시행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구체적인 실행 방침이 없어 아쉽다"고 말했다.
□ 절세목적 가족 차명계좌는 이제 그만= 단순히 예금을 찾는 것이 당국의 추적을 피할 수 있는 길은 아니다. 만일 거액 예금을 인출했다가 추후 이 자금을 다시 예치해 금융소득이 갑자기 늘어날 경우 국세청으로부터 자금 출처 조사를 받을 가능성이 남기 때문이다.
또한 섣불리 예금을 인출했다가 자칫 과세당국에 정보가 노출될 수 있다. 현행법상 2000만원 이상 현금을 인출하면 거래자 정보가 금융정보분석원(FIU)에 자동으로 보고된다.
이 때문에 당분간 차명계좌를 유지할 가능성도 크다는 분석이 나온다.
증여세의 경우 면제 한도를 이용해 세금을 내지 않는 범위에서 증여하거나 증여 신고 후 세금을 내고 증여하는 것이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타인 명의 계좌가 있더라도 정식 증여 신고를 하고 세금을 내면 실소유주가 바뀐 것으로 보기 때문에 국세청에서 검찰 고발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시중은행의 한 PB는 "과거 금융소득 종합과세 누락분이 일시에 과세될 수도 있고 사업자의 경우 현금 매출에서 누락된 금액이 있으면 별도로 법인세, 소득세를 더 내야 할 수도 있다"고 조언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