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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남일의 시간여행]

설탕, 달콤함의 그림자… 콜럼부스는 악마

  • 보도 : 2019.05.17 08:20
  • 수정 : 2019.05.17 08:20

사탕수수와 설탕

◆…사진=클립아트코리아

단맛의 유혹은 인류 시작부터 있었나 봅니다. 성경 속 이브의 사과나 절벽에서 꿀을 따는 9천 년 전의 바위그림, 게다가 꽃잎과 단풍나무 수액 혹은 용설란(아가베 선인장)을 즐긴 흔적들이 그런 까닭이겠습니다. 모두가 자연 그대로의 단맛이란 공통점을 갖고 있지만 예외적인 식물이 하나 있었지요. 바로 사탕수수(sweet reed)입니다.

호주 북쪽에 위치한 뉴기니 원주민들은 오래전부터 단맛의 갈증을 사탕수수로 해결했습니다. 사탕수수는 그 어떤 식물보다 달고, 줄기에서 나오는 즙도 상당하여 신의 선물로 귀히 여겼습니다. 이 식물이 뱃길을 타고 인도에 전해진 때가 기원전 5백년 경인데, 인도를 정복한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황제 시대에 들어서 다시 이집트 및 중앙아시아로 퍼져나갑니다. 놀라운 점은 이때 이미 사탕수수 즙을 가지고 설탕을 만들어 낸 사실입니다. 비록 오늘날의 설탕과는 전혀 다른 짙은 황갈색의 작은 결정체였지만 분명 설탕은 설탕이었습니다.

당시 인도인들은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과정에서 우연히 설탕을 발견합니다. 그들은 신과 교감하는 매개로 불을 이용하였는데, 불은 연기를 만들고 그 연기가 하늘의 신에게 도달한다고 믿었지요. 해서 불 위에 특별한 공물을 올려놓고 소원을 빌었습니다. 곡식이나 우유, 나무열매가 주된 진상품이었지만 간헐적으로 사탕수수 줄기도 얹혀 놓았습니다.

그런데 사탕수수를 불에 쏘이자 줄기 껍질 밖으로 진한 액체가 맺히고, 그것 중 일부가 식어 덩어리로 굳는 것을 본 것입니다. 이 경험을 계기로 해서 후에 사탕수수 액을 끓여 응고시킨 다음 딱딱한 설탕 조각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설탕은 만들어 내는데 너무 까다로워 소량으로 생산해서 종교의식이나 치료를 위한 약물 혹은 일부 특권층의 소유물로 이용됩니다.

초기 설탕의 이름은 고대 인도어로 '달다'라는 뜻의 '샤르카라(sharkara)'이었습니다. 그것이 페르시아 왕국에 와서 '샤케르(sharker)'라 불리고, 이슬람 시대에는 '슈크르(shukr)', 그리고 오늘날 영어의 '슈거(sugar)'로 변해왔습니다. 현대 아랍어로 '고맙다'를 '슈크란'이라 하는데, 이는 본디 '달콤하다'의 '슈크르'에서 파생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이처럼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이름이 바뀌는 동안, 사탕수수 재배와 정제 기술도 발달하고 선박에 의한 국제해상무역도 활성화 되면서 11세기에 이르러 설탕 소비가 급격히 늘어납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생산의 한계성이 있었기 때문에 4백여 년간을 더없이 귀한 존재로 자리합니다.

여기서 잠시, 꽤나 오랜 세월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설탕을 다량으로 만들지 못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요인은 크게 네 가지, 시간· 장소· 땔감· 노동력을 들 수 있습니다. 사탕수수는 베어서 24시간 안에 가열해야하기 때문에 경작지 근처에 제조 공간이 있어야 하고, 주변에 땔감용 나무가 풍부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땅을 고르고, 심고, 기르고, 베고, 운반하고, 끓이고, 정제하는데 적합한 장소와 설탕을 실어 나를 바닷가가 가까이 있어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탕수수는 열대성 식물이라 재배지역이 한정되는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이런 제약 조건을 만족하는 곳은 극소수라 더욱더 일부 계층만 설탕 맛을 볼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생산 조건을 충족하여 다량의 설탕을 얻는다면 그야말로 엄청난 부를 거머쥘 수 있지 않겠습니까. 바로 여기서 인간의 추악한 탐욕이 드러납니다. 그 주인공은 1400년대 스페인과 포르투갈로 가장 먼저 얼룩진 설탕 역사의 첫 장을 펼칩니다.

이들 나라의 계획은, 열대 기후에 있는 섬을 정복하여 그곳에 '플랜테이션'을 건설하는 것이었습니다. 플랜테이션이란 일정한 공간에서 설탕이 완성되어 배에 선적되는 전 과정을 말합니다. 오늘날 원스톱 서비스(one stop service)와 같은 개념이지요. 여기에 투입될 노동력은 현지 주민과 아프리카에서 잡아온 사람으로 채워놓는 것입니다.

최초 플랜테이션은 대서양 북아프리카 인근의 '카나리아 제도'였습니다. 잡혀온 노예와 원주민은 채찍의 감시 속에 지옥생활을 강요받았습니다. 그 고통과 비례하여 설탕은 다량의 결실을 맺게 됩니다. 이 성공에 자극을 받은 콜럼부스는 사탕수수 묘목을 가지고 '히스파니올라 섬'에 정박하여 새로운 플랜테이션을 건설합니다. 이후 4백여 년간 영국·프랑스·네덜란드 등 유럽 각국도 설탕사업에 참여하면서 카리브 해 거의 모든 지역은 설탕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아프리카에서 잡힌 노예들은 무려 천오백만이 넘고, 현지에서 아이로 태어나 대를 이어 노예가 된 이들이 훗날 쿠바, 자메이카, 아이티, 브라질 등등 중앙아메리카 국가의 구성원이 됩니다. 불굴의 개척정신으로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했다고 떠 받드는 콜럼부스는 다른 한 편으로 노예왕국의 첨병 역할을 한 사악한 악마에 지나지 않습니다.

설탕 노예들의 삶은 고통 그 자체였습니다. 이들은 인간이 아니었고 뛰노는 개만도 못했습니다. 처녀는 물론 설령 결혼했다 해도 영주가 부르면 달려가야 했습니다. 저항은 죽음 혹은 타 지역에 팔려가는 일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글을 익히는 자체가 죄악이고, 대화 대신 오로지 일만을 강요받았습니다. 족쇄와 채찍에서 벗어나는 시간은 하루 중 잠드는 때뿐이었다 했으니  얼마나 비참했겠습니까. 그러나 역사는 결코 어느 한 편에 머물 지는 않는 법이지요.

1775년 영국에서 넘어 온 북아메리카 사람들이 영국정부에 반기를 듭니다. 영국의 턱없이 높은 세금(설탕세) 부과와 본국(영국)인과의 차별정책에 불만이 터진 것입니다. 식민지인들은 자유와 평등을 내세우며 영국과 싸워 마침내 '아메리카 합중국(미국)'이라는 신생 국가를 탄생시킵니다.

이 일련의 사건은 유럽전역에 '인권'이란 화두를 던지게 됩니다. 당장 영국 내에서는 노예폐지운동이 전개되고, 프랑스에서는 바스티유 감옥을 부수고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발표합니다(프랑스 대혁명). 이에 고무된 프랑스령의 설탕 식민지 '생 도밍그'에서는 노예 지도자 '투생'이 반란을 일으켜 현재의 아이티 공화국을 세웁니다. 자메이카 역시 피로 물든 투쟁 끝에 1789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합니다. 하지만 '누구든 생명권, 자유권, 재산권을 갖는다.'는 권리를 내세워 독립한 미국은 반세기를 훌쩍 넘긴 1863년에야 노예 해방을 선언합니다.

노예들이 풀려나면서 설탕량은 급격히 감소했습니다. 그러자 생산국들은 값싼 노동력을 구하기 시작합니다. 처음 대상은 중국인과 인도인이었습니다. 이 노동자들은 변변찮은 돈을 받긴 했지만, 생활은 노예와 별반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수가 증가하면서 요구 조건이 많아지자, 경작자들은 일본인에게 눈을 돌렸고 그들조차 조직화 되어갈 즈음, 그 다음에는 필리핀, 한국(조선), 심지어 설탕 플랜테이션의 원조 격인 스페인과 포르투갈인도 동참시켰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하와이 섬이 노예가 아닌 임금 노동자로 설탕 농장을 꾸렸기 때문에 오늘날 가장 많은 국가의 국민들이 현지화 되었다는 점입니다.

설탕, 그 달콤한 유혹은 인간이 인간을 도구화하는 잔혹성을 드러낸 반면, 인권의 보편적 가치를 확산시켜 유럽을 흔들고 미국을 포함한 중남미 많은 국가를 탄생시켰다는 역사적 기록에 잠시나마 숙연한 감상에 젖게 됩니다.  홍남일 한·외국인 친선문화협회 홍보이사

홍남일 한·외국인 친선문화협회 홍보이사

[약력] 한국외국어대 졸업, MBC애드컴 카피라이터, 한국전통문화진흥원 자문교수, 수필가, 문화칼럼니스트 [저서] 이야기가 있는 인천 관광 가이드, 시간이 담아낸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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