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촉구하는 촛불 집회가 이 땅의 시위역사를 새로 쓰며 한국 민주주의의 새로운 기원을 열어가고 있다. 대통령과 그 정부에 대한 실망과 분노로 거리에 뛰쳐나왔지만 분노를 파괴적 행위로 표출하기 보다는 풍자와 패러디로 승화시키고 더 나은 삶을 열망하는 시민축제의 장으로 시위문화 자체를 바꾸어가고 있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어처구니없는 얘기들이 매일 쏟아지는 가운데 촛불을 들고 즉각 퇴진의 퍼포먼스를 외치는 국민들이 어느새 드라마의 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다. 100만-200만이 넘는 집회와 행진이 동시 다발적으로 거듭되고 있지만 폭력행위로 인한 연행자나 부상자는 단 1명도 발생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민들은 집회를 마치고 스스로 쓰레기를 줍고 주변을 정리하는 등 놀라운 절제와 성숙함을 보여줬다. 경찰차벽을 '꽃벽'으로 장식하고, 경찰들은 시위자들에게 핫팩을 던져주고 기념사진을 찍어줬다. “하야, 하야, 하야”를 랩에 실어 노래하고 '1분 소등'과 '촛불파도타기'로 거대한 화합의 장을 연출하고 있다.
이 광장의 힘은 대통령은 있어도 대통령의 역할은 이미 끝나게 만들었다. 촛불 민심이 거대한 쓰나미가 되어 한국정치를 이끌어가는 핵심동력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엇박자를 내는 세 야당을 대통령 탄핵대열로 몰아넣고, 새누리당 비박계를 탄핵표결 참여 쪽으로 유턴시키며 여당의원들을 탄핵자유투표로 내몰고 있다.
유례가 없는 한국의 평화촛불 집회에 세계도 놀라고 있다. '대통령이 떨어뜨린 국격(國格)을 국민들이 높이고 있다.'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 어떻게 저런 강력한 에너지가 만들어질 수 있느냐'고 경이로운 눈길을 보내고 있다.
광화문광장을 비롯해 전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집회는 과거 그 어느 시대의 시위와도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그들은 특정 계급의 사람도 아니고, 특정 연령이나 종교, 특정 문화의 집단이 아니다. 국민들이 맡긴 권력이 이상한 사람들에 의해 농단당하고, 엄청난 부패와 그 비리의 연결고리들에 분노하면서 바른 나라, 바르고 정의로운 사회를 세우려는 열망 하나로 촛불을 들고 모여들고 있다.
어린아이들이 부모의 손을 잡고 촛불을 들고 있는 모습은 정치꾼들의 행위도, 좌파 운동권의 유혹에 넘어간 모습도 아니다. 국민 주권을 확인하고 시민들의 평화로운 의사 표시가 갖는 힘과 민주공화국의 가치를 아이들에게 일깨워주는 소중한 교육의 장으로 승화되고 있다. 목적은 같지만 다양성과 차이를 존중하고, 자유롭고도 평등한 주권자 개개인이 자발적으로 모여 거대한 흐름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지난 3일(토요일) 전국에서 거리로 뛰쳐나온 국민 232만 명은 집회를 주관해온 쪽도 기대하지 않았던 숫자였다. 독려하지도, 전략을 짜지도 않았다고 한다. 권위적 중심이 없고, 하나이되 동시에 다양한 이 촛불민심이야말로 우리시대의 새로운 희망이 아니고 무엇이랴.
촛불 집회는 거대한 문화축제다. 문화예술가를 비롯해 일반 시민들조차 톡톡 튀는 다양한 아이디어로 현 시국을 풍자하고, 집회 곳곳에서 해학이 넘쳐난다. '하야수'와 핫팩, '대통령 그만두유'와 '下野'라고 새긴 후드와 티, 마스크 등 '투쟁소품'들을 공유하며 긴 싸움에서 지치지 말자고 서로의 처진 어깨를 다독인다.
웃고 즐기는 집회로 국민들이 권력을 풍자하자 개그 프로그램에서도 정치세태 풍자가 다시 나타났다. '우리가 궁금한 건 산더미만큼 / 많고 많지만 정말 궁금한 건 / 당신의 7시간' '역대급 삥땅' '하도 찔러대서 얼굴이 빵빵' '우주의 기운에 나라가 기우네' 등의 가사로 박 대
통령과 관련된 각종 의혹을 노래한다.
'IT(정보통신)강국'답게 IT형 첨단 시위문화도 선보이고 있다. 집회참가인원을 놓고 경찰 추산과 집회 측 추산 간 차이를 의식한 듯 '집회 출석' 앱도 등장했다. 성별과 연령 정보를 선택할 수 있고 위치서비스를 기반으로 출석체크를 할 수 있다. 촛불 화면을 제공하며 응원메시지를 주고받기도 한다.
촛불 집회 방송인 '집방'도 인기다. 전국에서 190만 명이 모인 지난달 26일 촛불 집회 때는 무려 3백 개가 넘는 개인 방송이 진행됐고, 시청자 수도 50만 명에 가까웠다고 한다. 광장과 청와대 앞 시위에 함께하지 못하는 수많은 시민들은 스마트폰과 모니터를 통해 집회 생중계를 보며 함께 촛불을 들었다.
촛불을 움직이는 힘은 평화다. 가장 힘 있는 시위는 폭력 아닌 평화적 시위며 그래서 일부러라도 아이들 손을 잡고, 가족 단위로, 연인끼리 나왔고, '비폭력' '내려와'를 연호하며 보이지 않는 질서를 만들어내고 있다.
대통령에 대한 탄핵 절차가 지연되면서 촛불민심의 분노가 야권으로, 국회로 번지고 있다. 여야 정치권이 민심을 정확히 파악해 국민의 걱정을 덜어줄 시국 해법을 내놓기는커녕 당리당략에 매몰돼 허둥대고 있기 때문이다. 집회 현장에서 유력 정치인들이 따돌림 당할 정도로 촛불민심은 한국 정치를 바꾸어가는 동력이 되고 있다.
하야든 탄핵이든 박대통령의 임기 내 퇴진은 피할 수 없게 됐다. 대통령 스스로 헌법 질서를 유린해 민주주의가 퇴행되고, 국격은 땅에 떨어졌으며 남북관계와 경제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대통령의 권위와 리더십이 바닥으로 추락하면서 외교채널 가동에도 초비상이 걸렸다. 미국 트럼프 새 정부 핵심 인물과의 면담 주선에 “한국의 죽은 정부와 상대할 필요가 있는가. 다음 정권이 들어서면 보자”는 반응마저 전해진다.
즉각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민심에 대통령이 조속히 용단을 내리고 야당도 촛불에 기대어 정치적 이득을 챙기려는 자세에서 벗어나 '박근혜 이후'에 대한 제대로 된 해법을 내놓아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그토록 소망했던 아버지 박정희의 역사적 복원은 박근혜 대통령 자신으로 인해 회복 불가능한 상처를 입었다. 권력이 소수에 독점되고, 기득권을 먹이사슬로 정치권과 정부 재계 언론이 유착된 권력카르텔은 박정희시대 때부터 고착화돼 지금에 까지 이르렀다.
수백 만개의 촛불이 명예로운 '시민혁명'으로 성공하려면 단순한 권력교체가 아니고 나라와 정부의 진정한 존재가치가 올바로 세워지고, 그를 실현할 국가적 틀과 체제가 제대로 갖춰져야 한다.
촛불민심의 명령은 지역주의와 세대분열, 안보위기에 기대여 기득권을 유지하고, 패권을 도모하는 정치가 아니라 다양한 국민의 이해가 반영되고, 국민이 참여할 수 있는 정치를 제도화하라는 것이다. 촛불광장의 민주적 에너지를 국가적 역량으로 결집시켜 우리 모두가 '박근혜 이후'를 대비할 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