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양극화에다 취업난, 중산층 붕괴에 따른 좌절과 실망이 '분노의 정치'로 세계 정가에 회오리를 몰아오고 있다. 기존정치와 기득권 체제에 대한 불신과 분노의 진원지가 정치적 민주주의와 글로벌 자본주의 제1번지 미국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은 시대의 아이러니다.
2016 미국대통령 선거의 '키워드'는 분노다. 보수와 진보가 각기 기득권화되고, 상위 1%가 과도한 정치 경제영향력을 행사하며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현실에 대한 불만과 좌절이 트럼프 돌풍과 샌더스 현상을 불러왔다.
도널드 트럼프는 “미국인들이 분노하고 있다. 나에 대한 분노가 아니고 정체된 임금, 일자리 해외유출, 잘못된 무역협정 등에 분노하고 있다”며 자신은 그 분노를 전하는 메신저일 뿐이라고 거듭 주장한다.
버니 샌더스는 상위 1%가 전체 소득의 20% 이상을 가져가는 지나친 불평등 때문에 중산층이 몰락하고 있다며 중산층과 근로자를 보듬는 정치혁명을 호소하고 있다.
트럼프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포퓰리즘적 화두를 던진 반면 샌더스는 사회주의적 개혁의 담론을 제시한 점이 다를 뿐이다.
주류 정치권과 언론들이 '트럼프 돌풍은 미국의 수치'라며 집중포화를 퍼붓고 있지만 트럼프는 경쟁자들이 경선을 포기한 가운데 사실상 공화당후보로 확정된 상태다. 공화당의 주된 지지기반은 중년의 백인근로계층이다. 세계화와 저임이민노동자, 자유무역으로 고통 받는 이들의 불만을 감지하고 그 분노를 자신의 선거캠페인 연료로 십이분 활용하고 있다.
샌더스의 지지층은 20, 30대 청년층과 무당파 유권자들이다. 최저임금 인상과 부자증세 등을 통해 1%가 아닌 99% 국민들의 '믿을 수 있는 미래'를 재건하자며 정치혁명과 경제정의 관철을 이들의 감성에 호소하고 있다.
샌더스는 힐러리 클린턴에게 돌발적 악재가 생기거나, 클린턴에게 지지를 표명한 520명의 슈퍼대의원들이 전당대회 때 샌더스 지지로 대거 마음을 바꾸는 이변이 생기지 않는 한 민주당후보가 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하지만 지금까지 지역경선에서 44%의 득표율을 보였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그의 선거 운동은 미국 정치사에서 한 획을 그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대기업 후원 없이도 대중 모금만으로 클린턴 후보에 대적할 재정을 마련했고, 소셜미디어를 통해 여론을 형성하는 청년층의 마음을 사 경쟁자인 힐러리조차도 샌더스 현상으로 표출된 민심의 요구에 진보적인 공약 수정으로 적극 부응토록 만들고 있다.
공화당의 트럼프후보마저 최저임금인상과 부자증세 등 닮은 꼴 주장으로 자신을 샌더스와 일치시키는 전략을 구사할 정도다. 샌더스 지지자 상당수가 대선에서 샌더스에게 투표할 수 없을 바엔 클린턴이 아니라 차라리 트럼프에게 표를 주겠다고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미국 대중들의 미래에 대한 불안과 불만이 트럼프와 샌더스라는 아이콘을 통해 분출되면서 이른바 '워싱턴 정치'와 그 시스템, 월가의 큰 손과 법조계, 주류언론, 관변 지식인들이 견고하게 구축했던 '저들만의 천국'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이다.
국민들에게 경제회복이 피부로 느껴지지 않는 가운데 중간소득계층들의 실질임금은 지난 15년 동안 제자리걸음이다. 흑인 대통령은 지난 7년간 불법 이민에 관대했고, 유색 인종 보호에 엄청난 세금을 썼다. 세계화로 생산공장은 해외로 빠져나가고, 국내 일자리는 저임 이민노동자들에게 빼앗기고 있다. 세계평화 유지에 우리 돈으로 연간 700조 원 가까이 쓰면서도 정작 미국인들은 테러위협을 안고 살아야하는 처지다.
미국사회가 인종차별을 금기시해 온 것은 교육의 힘이었다. 다인종 이민국가인 미국을 세계 최강으로 만든 힘도 여기서 나왔다. 미국의 국력이 상대적으로 쇠락하면서 '세계경찰'로서의 국제문제 개입에 대한 국민들의 피로감도 누적된 상태다.
미국을 국내에서와 해외에서 다시 위대하게 만들고, 미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강력한 지도자를 미국 대중들이 찾게 된 것이다. 트럼프의 외교정책이 '미국 우선주의'라면 샌더스의 경제정책은 '미국 일자리 우선'이다.
트럼프는 기성 정치인들이 입에도 담지 못하는 직설과 독설로 대중의 마음을 파고들고 있다. '막말'이라는 비난과 공격이 쏟아지지만 대중들은 솔직 담대하게 '진실'을 말하는 것으로 믿는다. “입에 발린 소리만 하는 정치인들에게 질렸다. 트럼프의 발언에 전부 동의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는 우유부단하지는 않다”는 반응들이다.
정치경험이 없다는 비판을 받지만 “경험 많다는 정치인들이 그동안 국민에게 해준 게 뭐냐. 부패하고 망가진 정치 외에 무엇이 있나. 최소한 트럼프는 국민에 솔직하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트럼프가 후보로 확정되기까지에는 '트럼프 불가'를 외치는 공화당 주류와의 화합과 협력 등 넘어야 할 난관도 적지 않다. 하지만 트럼프는 지금까지의 선거운동만으로도 이미 미국과 세계정치를 변화시키고 있다.
세계화와 자유무역 거부 움직임이 벌써부터 심상치가 않다. 힐러리 클린턴마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반대로 돌아서게 만들었다.
미국 우선주의와 무슬림 입국 금지 공약은 미국이 중시해온 국제주의와 다원주의라는 근본 가치를 흔들고 있다. '세계 속의 미국' 대신 '미국 우선주의'를 원하는 고립주의 정서는 샌더스를 지지하는 청년 유권자, 근로자 계층, 심지어 중산층에서도 확산되고 있다.
워싱턴과 월 스트리트, 대학 등 엘리트집단과 주류 언론에 대한 대중적 불신은 기득권 구조를 무너뜨리는 정치혁명을 부채질하고 있다. 트럼프를 지지하는 수백만 민중들의 환호에서 미국 정치의 거대한 지각 변동을 읽어내기는 어렵지 않다.
트럼프현상은 트럼프가 후보가 되지못하거나 대선에서 낙선해도 지속되고, 샌더스 현상 또한 20세기 초 진보적 운동이나 뉴딜정책 같은 사회운동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적지 않다.
신자유주의에서 비롯된 사회 양극화와 경제적 불평등 심화는 전 지구적 현상이다. 빈부격차에 좌절한 몰락 중산층과 빈곤층의 분노는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청년실업과 주택난, 중산층 붕괴로 기존 정치체제에 대한 불신이 커지고 그 분노가 총선에서 여당의 패배, 제3당의 출현을 가져왔다. 그럼에도 총선이후 새누리당은 차기후보는 물론 집권비전조차 보여주지 못하고 자중지란에 빠져 전통적 보수층마저 등을 돌리는 상황이다.
기존 정치와 사회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필리핀의 트럼프'를 낳았다. 불만에 찬 청년 유권자들과 몰락한 중산층의 분노를 업고 '한국의 트럼프'가 나타나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며 한국정치에 지각변동을 불러올 가능성도 배제 못한다. 이 어찌 남의 일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