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가 붙여주는 가치

정관사는 명사 앞에 붙어서 지시나 한정의 뜻을 나타낸다. ‘그’나 ‘the’가 대표적인 예다. 정관사 the는 앞 문장에 나온 보통명사를 뒤의 문장에서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 통례다. 문제는 the가 그렇게만 사용되지 않는데 있다.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 앞에도 떡하니 자리잡고선 그 형용사를 명사로 둔갑시킨다. 부자와 가난한 이를 일컫는 말 ‘the rich’와 ‘the poor’가 그것이다. 

어디 그 뿐이랴. 고유명사는 그것을 쓰면 그 순간 그게 무엇인가가 바로 형상화되는 명사다. 그 자체로 무엇을 지칭하거나 한정하므로 굳이 the가 안 붙어도 될 것 같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고유명사에도 the가 붙는 수가 있다는 것이다. The Alps,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등등이 바로 그것.  

그 외에도 the의 용법은 무수하다. 한 포탈 사이트를 검색해보면 the를 사용한 문장의 예가 무려 15,755,654개나 나온다. 그러니 학창시절 the가 입시문제로 나오면 하나 틀려주지 했다가도 찝찝해서 다시금 the의 용례를 무턱대고 외어댔던 경험이 모든 이들의 추억 속에 남아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골탕 먹이기로 작정하지 않고서는 그렇게 어려울 수가 없다. 

‘The’는 미국 메이저리그에서도 심심찮게 사용된다. 2009년 뉴욕양키스와 뉴욕메츠 간 서브웨이 시리즈. 같은 뉴욕을 연고로 하니까 화기애애할 것 같으나 천만의 말씀. 앙숙도 그런 앙숙이 없다. 7:8로 뒤진 9회말 2사 주자 1,2루 상황에서 양키스 공격. 타석에 들어선 양키스 타자가 평범한 내야 뜬공을 쳤다. 메츠의 2루수가 손을 번쩍 들었다. 경기가 종료될 것 같았는데 이게 웬일. 글러브에 들어간 공이 글로브를 맞고 톡 튀어 나오는 바람에 주자가 모두 홈인, 9:8로 경기가 끝난 것. 

흥분한 양키스측 해설자가 “He dropped the ball”을 계속 외쳐댔다. 그 후 문장인 “히드랍더볼”은 평범한 뜬공을 놓치는 에러를 지칭하는 명사가 됐다. 얼핏 생각하면 “He dropped ‘a’ ball”이라 했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the ball’의 ‘the’는 9회말 2사후 양키스 타자가 친 그 뜬공을 특정한 것이므로 문법에 맞는 것 같다. 미국인의 말이 영문법에 맞는가를 필자가 따지는 것이 쑥스럽기는 하지만 말이다.

올해 월드시리즈가 캔자스시티 로열즈의 우승으로 막을 내렸다. 상대는 또 뉴욕 메츠. 7전4선승제의 월드시리즈에서 캔자스는 3승1패를 거두었다. 5차전만 이기면 30년만의 우승. 캔자스는 9회초 1사까지 1:2로 밀리고 있었다. 타석에 들어선 캔자스 타자가 주자 3루 상황에서 평범한 3루앞 땅볼을 쳤다. 메츠 3루수가 3루주자 호스머를 묶어놓고 1루로 송구, 타자주자를 아웃시킨다. 1루로 송구되는 바로 그때 호스머가 벼락같이 홈으로 쇄도하여 슬라이딩한다. 타이밍은 누가 봐도 아웃. 

그러나 화들짝 놀란 메츠 1루수가 포수에게 던진 공이 살짝 빗나가면서 세이프된다. 경기를 원점으로 돌린 캔자스는 연장14회 5점을 뽑아 월드시리즈를 끝냈다. 호스머의 전광석화 같은 이 슬라이딩을 미 언론은 ‘The Sliding’이라 명했다. 앞으로도 승부처에서의 벼락같은 홈 슬라이딩은 더 슬라이딩으로 불릴 것이다.  

히드랍더볼이나 더 슬라이딩의 the와 같이 the는 특별히 기억할만하거나 유일무이한 상황 또는 이벤트에 붙어서 이를 특히 강조하는 역할도 한다. PGA의 4대 메이저골프대회의 하나인 ‘The Open Championship’도 그렇다. 골프 최강국임을 자부하는 미국 언론이 아무리 이 경기를 ‘British Open’이라 폄하해도 팬들은 ‘The Open’을 고집한다. 골프의 발상지이자 원조인 영국에서 개최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도 the를 붙일 수 있는 경우가 있다. 피겨 불모지였던 대한민국을 ‘반짝 피겨강국’으로 세워놓은 김연아 선수의 우아하면서도 다이내믹한 연기가 그것이다. 그녀는 파리가 앉으면 미끄러질 정도로 반질반질한 얼음판을 주름지게 만들었다. 그녀에게 주름잡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The Fig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