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낮춘 국세청의 연말정산서비스

PGA가 주최하는 골프대회는 나흘간 진행된다. 첫 이틀은 같은 선수 두 명이 한 조가 되어 두 선수 합쳐 하루 평균 140타 내외를 친다. 하루 140번 정도 상황이 바뀐다는 것이다. 희한한 것은 같은 선수들이 쳤는데도 첫날 140번의 장면과 다음날 140번의 장면이 일치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점. 이 선수의 첫날 첫 티샷은 오른쪽 페어웨이에 안착했으나 다음날의 그것은 왼쪽 러프에 빠지고, 다른 선수에게는 반대현상이 생기는 등 칠 때마다 어제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 벌어진다.

축구나 야구와 같은 단체경기에도 그런 현상은 어김없이 생긴다. 스포츠경기를 ‘각본 없는 드라마’로 부르고 관중들이 거기에 열광적으로 빠져드는 것의 이유다. 각본 없는 드라마인 만큼, 스포츠는 ‘예측불가능성’을 특징적인 요체로 한다.

행정은 이와 사뭇 다르다. 철저하게 각본대로 진행됨으로써 예측가능성을 충분히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각본이 바로 법령이다. 조세행정은 더더욱 그러하다. 국민 재산권을 침해하기 때문. 그 중에서도 근로소득 연말정산은 특히 중요하다.

2013년말 현재 봉급생활자 1636만명 중 1105만명이 22.3조원을 소득세로 납부했다. 당시 국세세입예산 202조원의 11%다. 18대 대선 당시 총유권자(4053만명)중 전체 봉급생활자와 세금 낸 봉급생활자가 차지하는 비율은 각 40.4%와 27.3%에 달했다.

그들의 배우자와 19세 이상 학자녀들까지 감안한다면 그 비율은 가히 절대적이다. 거기에다 이 유리지갑들은 사업자들에 비해 많은 세금을 낸다는 상대적 박탈감에 젖어 있다. 연말정산에 문제가 생기면 세정차원에서는 물론 정치적으로도 대단히 예민한 이슈로 번질 수 밖에 없는 것의 이유들이다.

올해 초 연말정산이슈가 심각한 논란거리로 대두된 바 있다. 2013년말 소득공제가 세액공제로 대체되고 각종 감면이 축소됐다. 그러면서 올 초 2014귀속 연말정산시 봉급생활자 638만명, 특히 5500만원이하 급여수령자들의 세부담이 늘어났다. 세법이 개정되고 1년 넘게 지나간 시점이라 어느 정도는 예견할 수 있었을 법도 했으나 연말정산서를 받아 든 봉급생활자들의 불만이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왔다.

여론이 들끓자 정부와 국회는 올 5월 소득세법을 개정, 추가자녀세액공제액과 근로소득자 표준세액공제액을 인상하고 6세 이하 자녀와 입양아에 대한 세액공제 등을 신설한 후 이를 소급 적용했다. 그 638만명에게 4560억원을 환급해 준 것.

봉급생활자들 특히 2·30대가 그 대부분을 차지하는 5500만원이하 급여수령자들의 연말정산에 얼마나 위력적인 마그마가 잠재돼 있는가를 보여준 단적 사례다. 1996년에도 비슷한 케이스가 있었다. 이 때문에 ‘20년주기설’이라는 웃지못할 농담까지 회자됐다. 그런 터에 필자의 눈길을 확 끄는 기사가 떴다. 국세청이 ‘미리 알려주고 미리 채워주는 간편한 연말정산서비스’를 전산을 통해 제공한다는 것.

그 중 핵심은 ‘미리 알려주기’다. 이 서비스는 ①신용카드소득공제액 계산 ②연말정산 예상세액 계산 ③3개년 추세, 항목별 절세 팁 보기로 구성되어 있다. ①에서는 올해 남은 기간 중 얼마를 신용카드로 쓰고 전통시장과 대중교통에 얼마를 더 써야 공제 폭을 최대로 키울 수 있는지를 숫자로 적시해 준다. ②에서는 연말정산시 환급받거나 납부할 세액을 계산해 준다. ③에서는 입력된 데이터를 기초로 신용카드·교육비·의료비·주택자금이자·연금저축·보험료·기부금 등 항목에서 어떻게 하면 세금을 줄일 수 있는가를 알려준다. 세금을 걷는 국세청이 모든 봉급생활자들을 상대로 1대1 맞춤형 절세설계를 제공해 준다는 얘기다. 외국에서도 거의 들어보지 못한 대(對)국민서비스다.

2000년대 초 국세청은 National Tax Administration이었던 영문 기관명을 National Tax Service로 바꿨다. Service보다는 Administration이 훨씬 권위있고 폼이 났음에도, Administration은 왠지 군림하는 듯한 느낌을 주니 국민의 납세를 위해 봉사한다는 뜻의 Service로 부드럽게 바꿨다는 것이 개칭의 변(辯)이였다. 새로 제공되는 연말정산서비스야말로 스스로를 서비스기관으로 몸을 낮춘 국세청이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그리고 잘 짜여진 각본을 통해 세정의 최고 덕목인 예측가능성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대단히 고무적인 조치로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