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선생님도 이해할 수 없는 세법의 표기법

시골학교 국어선생입니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누구보다 우리말을 소중히 여깁니다. 영어는 '영어'라고 떠받들면서 우리말은 마치 남의 나라 말 부르듯이 '한국말'이라고 하는 분들을 이따금 봅니다. 우리말을 비하하는 듯한 뉘앙스가 깔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그런 식이라면 자기 부인도 '우리 마누라'가 아니라 '한국 마누라'로 불러야 합니다.   
 
국제화 시대에 영어가 기본이라는 점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영어 작문할 때는 영문법 하나 하나에 신경 쓰면서 우리말로 글을 쓸 때는 '알아서 새기겠지'하면서 마구 작문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우리말에 우리의 혼과 얼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XX시설공단은 철도민원구간의 기 계획된 방음벽 설치계획을 고려하고,∙∙∙ 흡음율이 높은 방음벽을 설치한다.” 어느 아파트단지에 붙은 국가기관∙지방자치단체 등 5개 기관의 합의문입니다. 일종의 공문서인 셈입니다. 그러나 공문서라고 하기에는 창피할 정도로 어법이 맞지 않습니다.

'계획된 방음벽 설치계획'의 동어(同語)반복이 거슬립니다. '수립된 방음벽 설치계획'이라야 자연스럽습니다. '고려하고'는 또 뭡니까. 생각만 하고 말겠다는 것입니까. 서술어 '설치한다'를 보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원래는 “수립된 소음대책을 ‘고려하여’ 방음벽을 설치한다”고 쓰려 한 것이 머리와 손이 따로 놀았습니다.

이 정도의 공문서라면 어법이 조금 틀려도 크게 문제되지는 않습니다. 민원을 해결해 준다는 얘기니 새겨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금의 영역으로 가면 상황은 사뭇 달라집니다. '납세자가 알아서 새겨듣겠지' 했다가는 낭패를 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변호사인 친구가 어떤 세법 조항에 관해 물었습니다.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내용연수가 비한정인 무형고정자산'에 관한 것으로 기억됩니다.  

저는 '대통령령으로 정하는'이라는 관형구가 바로 뒤의 체언(體言) '내용연수'를 꾸민다고 생각했습니다. 관형구의 관(冠)자는 머리에 쓰는 갓을 뜻합니다. 그러니 관형구가 체언 위에서 체언을 꾸밈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통령령이 내용연수가 아니라 무형고정자산을 정한 것으로 볼 때 이 관형구는 한참 뒤에 배치된 무형고정자산을 꾸민다는 것입니다. 참 난감했습니다.

저를 또 한번 난감하게 했던 것은 '비한정'이라는 용어였습니다. 국어선생 30년에 한 번도 들어본 적 없고 사전에도 그런 단어는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창피를 무릅쓰고 되물었습니다. '비한정'이 '무한정(infinite)'을 뜻하냐고.

그 친구 답은 “한국채택 국제회계기준의 용어를 세법이 그대로 가져와 쓴 것인데 영어로는 'indefinite'로 표현돼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덧붙였습니다. “사람이 죽는 것은 확실하나 죽는 때를 모르듯 무형고정자산 중에도 가치가 언젠가는 영(零)이 되나 그 시점을 알 수 없는 것이 있는데, '비한정'은 그 경우를 가리킨다고.” 

내용연수를 확정할 수 없는 상황을 '비한정'이라 한 것입니다. 정체불명의 단어가 세법에 버젓이 자리잡았습니다.

이 세법 구절을 정확한 용어로 문법에 맞게 쓰면 이렇게 됩니다. “그 내용연수를 확정할 수 없는 것으로서 대통령령이 정하는 무형고정자산.” 그래야 하는 것을 문법이 틀린 것도 모자라 사전에도 안 나오는 용어를 쓴 것입니다. 교육 일선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자괴감을 느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백면서생인 제 눈에는 세법이 국가와 국민대의기관인 국회가 이럴 때는 국민이 세금을 내고 저럴 때는 국가가 세금을 걷지 않겠다고 약속한 계약으로 비쳐집니다. 계약의 한쪽 당사자가 국민인 만큼 세법은 국민이 알기 쉬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는 적확(的確)한 용어들을 제 자리에 배열해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국민이 세법과 친해져 세금을 내면서도 고개를 끄떡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