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랑공주'와 '호동왕자'

너의 안부가 궁금하면 어머니한테 전화하곤 하지. 오늘 수화기 너머로 어머니 목소리를 들으니 아흔을 마주한 세월에도 예전의 쩡쩡하시던 기력은 여전하시더라. 너의 두 공주님은 벌써 대학을 졸업하고 간호사가 되었는데 얼마나 이쁜지 모른다며 어머니의 사랑(자랑)이 대단하시다. 여동생도 결혼해서 아들딸 낳고 서울에서 잘 살고 있단다. 친구야! 엄마랑, 두 딸내미, 여동생 걱정은 아예 접어두게. 주변에서는 죄다 부러워할 지경이라니까.

아직도 어머니는 나한테 피해를 많이 줬다며 미안해하신다. 요즘은 교회에 다니시는데 매번 날 위해 기도한다는 말씀도 하시더라. 보고 싶다신다. 다른 친구들-준호며 동식이 이야기도 하시는데 기억력도 좋으시고 따뜻한 마음도 변함이 없으시다.

50년도 지났겠다. 초등학교 때 다리를 다쳐 목발을 짚고 절룩거리며 등교하는 너의 모습이 생각난다. 당시만 해도 깡촌에서 목발을 구경하는 것 자체가 신기했거든. 깡마른 체구에 지독히 내성적이고 볼품없는 나와는 판이한, 서울내기처럼 뽀얀 피부와 어울리지 않게 너무나 당당하고 당찬 목소리로 주변을 휘어잡았던 너. 모르긴 해도 많은 친구가 너한테 관심을 받고 싶었을 거야.

학창 시절 나에게 붙여진 별명은 단 하나밖에 없었지. 친구야! 기억나니? 네가 지어 준 그 별명, '낙랑'.
다른 친구들이 묻곤 했지. 왜 '낙랑'이냐고. 국어 시간에 선생님이 낙랑공주와 호동왕자 이야기를 했던 날이었지 싶다. 덩치 큰 네가 호동왕자가 되어 비릿한 나를 보호해 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내가 왜 좋았는지는 끝내 물어보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날 이후로 우린 '낙랑'과 '호동'이 되었지. 난 널 '호동'이라고 부르지 않았지만 넌 언제나 '낙랑'이라고 불렀던 단 한 사람이었지. 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이름 대신 늘 '낙랑'이라고 불렀잖아.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우리가 그때부터 찐친이 되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네가 날 아끼고 좋아했다고 생각하는 증거는 여럿 있지. 수업 시간이든 아니든 친구 사이에서 언제나 내 편을 들어주었고, 초·중학교를 다닐 때까지 수업에 필요한 준비물은 늘 챙겨주면서, 점심은 젓가락만 있으면 해결할 수 있었지. 게다가, 학교 앞 가게에 네가 선불금을 예치해 놓으면서 가게 아주머니께 했던 말 기억나니? "이 친구가 오면요, 만화책을 보거나, 어묵이나 먹고 싶은 거 먹고 나면 돈 받지 말고 이 돈에서 까면 돼요"

오래되어 기억은 밋밋하지만, 이 이야기도 마저 해야 할 듯싶다. 네가 보기에 숫기가 없고 내외하는 내가 안타까워 보였던 모양이다. 어느 해 여름방학 때 내 생일날에 네 동네 여학생을 데리고 우리 집에 온 적이 있었지. 밤은 깊어 가는 데도 집에 갈 생각은 하지 않고 피곤하다며 나 더러 그 여학생을 집까지 바래다주라고 했었지. 어림잡아 3~4㎞는 되는 거리인데. 보름달에서 3일 지난 하현달이 떴길망정이지.

아, 우리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상여를 매준 고마움도 잊을 수가 없다. 차마 다 말할 수 없는, 내가 다 기억하지 못하는 우리만의 이야기가 이뿐이겠는가, 친구야. '낳아 준 사람은 부모님이지만, 알아준 사람은 친구'(관포지교, 관중과 포숙아)라는 말을 그땐 몰랐지만, '부모 팔아 친구 산다'라는 이야기는 듣고 컸던 거 같아.

벽시계는 고장 날지언정 세월은 고장이 없다고 하더라. 고장 난 벽시계는 고치면 되지만, 고장 없는 세월이니 그냥 내버려 두었던 건 아니었을까. 내가 공무원이 되었을 때, 넌 크고 작은 사업을 시작했지. 양식 꼬막 사업도 하고, 번 돈으로 부동산에 투자한다는 소식도 들었고. 사업 수완이 대단해서 벌써 지역 유지가 되었다는 말을 들을 때면 네가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모른다.

고장 없는 세월에는 포장도로만 있는 줄 알았는데, 비포장도로도 있고, 산길도 있고 아무도 가지 않으려 하는 가시밭길도 있고 또 한 번 가면 되돌아올 수 없는 길도 있다는 걸 그땐 왜 몰랐을까. 부동산 투자 규모가 커지면서 자금 조달에 차질이 생겼고 나에게 돈을 빌려달라는 전화가 왔을 때도 전혀 사정은 모르고 있었지. 갚겠다는 기한이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되고 1년이 되어갈 즈음에야, 가족 모두 부산으로 야반도주하다시피 고향을 떠났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지. 그 후 사업 실패에 따른 충격으로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그리고 또 시간이 흘러 종로구 수송동에서 근무할 때였지. 누군가가 날 찾는다는 경비실의 연락을 받고 내려와 보니 네가 있었다. 때 묻은 옷에 걸음걸이는 중심을 잡지 못해 투덜대듯 우왕좌왕 그렸고 바닥에 침을 내뱉어 가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쏟아내고 있더라. 날 보는 순간 얼굴에 화색이 돌면서 천군만마라도 얻은 기세로 큰 소리로 '낙랑, 낙랑'하며 끌어안았지. 갑작스러운 출현과 행색에 얼마나 놀랐던지.

살다 보면 결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도 있고, 부정하고 싶은 날도 있지.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사연이 해피엔딩이 아니라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인데, 우리의 별명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었던가. 뽀얀 서울내기가 아닌 찌들고 헝클어진 너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본 지 몇 년이 더 지난 어느 찌뿌둥한 날에 고향 친구로부터 인정하고 싶지 않은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네가 별똥별이 되어 밤하늘에서 사라졌다고.

살아생전 겪어야 했던 그 고통이 애가 타고 섭섭하고 밉고 속상했다면, 친구야 이제 애쓰지 않아도 된다. 훗날 행여 천국의 문 앞에서 널 기억하지 못해 방황하고 있는 날 보거든 이 편지를 간직하고 있다가 손을 내밀어 줄 수 없겠니? 그때 우리 못다 한 이야기마저 다 하기로 하자.

생일이 다가오는 이맘때면 더 생각나는 호동이에게 낙랑이 보내다.

◆ 글쓴이 : 김종봉 세무법인 더택스 대표세무사
[약력] 현) 가천대학교 겸임교수 / 현) (사)대한바둑협회 임원(이사), 현) 서울사회복지공동모금회 모금분과실행위원회 위원, 서울청 국선세무대리인, 중부청 국세심사위원, 법무법인 율촌(조세그룹 팀장), 행정자치부 지방세정책포럼위원 / 가천대학교 경영학 박사 / 국립세무대학 총동문회 수석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