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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기적은 순간마다 ② 내 삶을 바꾸는 비밀

나눔에 국경은 없다

  • 보도 : 2015.02.09 09:00
  • 수정 : 2015.02.09 09:00

 나눔을 실천하다 보면 가끔 아내 모르게 진행되는 경우가 있다. 아내가 뒤늦게 다른 사람을 통해 알게 되어 몹시 서운해 한 적도 있었다.

원래 나눔이라는 게 돌발적인 상황에서 벌어지는 경우가 더러 있다. 따라서 나중에 도움을 받은 누군가가 어느 날 갑자기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다짜고짜 고맙다고 말하면 아내는 오해를 하고, 나는 그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진땀을 흘린다.

그래도 요즘은 아내가 이전보다 화를 덜 낸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을 돕고 싶어 안달하는 내 순수한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지금은 무슨 계획을 세우든, 무슨 일을 하든 가장 먼저 아내와 의논을 한다. 충분히 상황을 설명하고 나서 차근차근 아내를 설득시킨 후 내 계획을 추진한다.

지금은 내 일등 참모가 되어 내가 마음만 앞서 자칫 놓칠 수 있는 부분까지도 세심하게 짚어준다. 아내가 뒷마무리를 잘해 주어 실수할 가능성이 과거보다 훨씬 적어졌다. 이때부터 아내와의 갈등 아닌 갈등 문제를 계기로 나는 또 하나의 원칙을 정했다.

‘남을 도우려면 먼저 아내와 머리를 맞대라!’

작은 일이라도 아내와 머리를 맞대고 상의하면, 희생과 봉사의 형태가 좀 더 구체적이고 아름다울 수 있다. 모든 계획의 차질은 작은 오해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자칫 잘못하면 좋은 일을 해놓고도 욕먹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이다.

또 나눔과 기부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늘 가까운 친척들이 마음에 걸린다. 늘 어려운 이웃을 도우면서도, 가까운 사람들은 전혀 돌보지 않고 생면부지의 사람들만 돕는다며 아내가 불만을 토로한 때도 있었다. 몇 해 전 딸아이가 결혼을 했는데, 뭐 하나 제대로 해주지 못한 것에 대해 지금까지도 미안했다.

하지만 가까운 곳을 너무 의식하다 보면 먼 곳을 보지 못한다. 주변 사람들만 돌보다 보면 그 안에 갇혀 멀리 있는 더 어려운 이웃을 돌아볼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마음은 아프지만 어쩔 수 없이 친척들의 불만을 모른 척하고 지나칠 수밖에 없다고.

예수님도 고향 동네에 가서는 푸대접을 받지 않았는가. 가까운 곳에 마음이 묶여, 더 크고 넓은 곳을 바라보지 못한다면 내 시야는 좁은 곳에 갇히고 말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기회만 되면 지방이나 외국으로도 시야를 돌리게 되는 것이다. 나는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보다 나은 내일을 맞이하기를 바라고 또 바랄 뿐이다.

2010년 1월 캄보디아를 거쳐 미얀마로 향하는 일정으로 인천국제공항을 출발했다. 두 번째로 떠나는 미얀마 행(行)이었다. 참고로 나는 지난 2008년에도 미얀마에 ‘사랑의 학교’를 지어주고 돌아온 적이 있다.

앙코르와트 씨엠립국제공항에 내려 톤레삽 호수(Tonle Sap: 우리나라 경상도 크기만 한 호수)로 향했다. 뜨거운 공기가 온몸에 쏟아졌다.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이마에 땀이 흥건했다. 하지만 현지 주민들의 해맑은 미소를 볼 생각을 하니 견딜만했다.

캄보디아는 동남아시아 인도차이나 반도의 서남부에 위치한 나라로, 1863년 프랑스의 보호국이 된 이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일부가 된 나라라고 한다.

그후 1940년 일본에 점령되었고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하자 1947년 5월 프랑스연합 내의 한 왕국으로 독립하였으며, 1953년에는 완전한 독립을 이루었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로, 국민들의 생활환경이 최악인 빈곤국가이다.

톤레삽 호수에 도착하니, 멀리 수상가옥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호수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이들은 자신들의 삶의 터전인 이곳 톤레삽 호수에 수상가옥을 짓고 그 호수의 물로 빨래도 하고, 목욕도 하고, 식수로도 사용하면서 오물도 버리는 등 정말 세상에서 가장 열악한 위생상태에 있었다.

이곳은 오래전부터 ‘밥퍼나눔운동본부’가 들어와 교육과 식생활은 물론, 태권도 등을 가르치며 어려운 주민들을 돕고 있었다.

캄보디아에서 2박 3일간 봉사활동을 하며 정말 많은 눈물을 흘렸다. 인간으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최악의 환경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좀 더 배우고, 좀 더 일하며 자신들의 삶을 개척하려는 수많은 현지인들을 보며 이들을 위해 좀 더 많은 것을 해주지 못하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좀 더 찾아야 했다. 그냥 몸으로 봉사만 하기에는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때 한 봉사대원이 이런 나의 생각을 읽고는 조용히 다가와 말을 걸었다.

“지금 캄보디아에는 한 해에도 수많은 대학생 봉사자들이 찾아와 이들의 생활을 돕고 있습니다.

◆…2010년 11월, 석성창립 5주년 행사로 캄보디아 밥퍼봉사 활동(아내와 함께)

아무런 도움 없이 직접 여행사를 통해 이곳에 들어와 통상 2주간 정도의 일정으로 봉사활동을 하지만 정작 그 봉사자들이 묵을 만한 마땅한 숙소가 없어 곤란을 겪고 있습니다. 매년 울며 들어와서 다시 돌아갈 때도 울면서 떠나는 청년봉사자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파 견딜 수 없을 지경입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번뜩하는 음성을 들었다. 비로소 할 수 있는 일을 찾은 것 같았기에 기뻤다.

“좋습니다. 제가 한국에 돌아가는 즉시, 방법을 모색해 이곳에 봉사하러 들어오는 학생들이 묵을 숙소를 지어 드리겠습니다.

한창 자신의 인생을 즐길 젊은 나이에 이곳에 들어와 봉사하는 자랑스러운 한국의 대학생들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기쁩니다.”

나중에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건축비용 등 제반사항을 알아보니, 우리나라 돈으로 2천만 원 정도면 그곳에 봉사자들이 묵을 숙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 크고 중요한 문제가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어린이들의 무료급식소 확장문제였다.

캄보디아에서의 일정을 마친 후, 최일도 목사와 함께 미얀마로 넘어갔다. 미얀마 역시 캄보디아 못지않은 척박한 환경을 지닌 나라다.

미얀마는 인도차이나 반도 서북쪽에 위치한 나라로 1885년 영국의 식민지가 되면서 영국의 아시아 식민지의 거점이 되었다가 1948년 1월 4일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며 국호를 ‘버마연방’이라 하였다. 다시 1989년 국호를 ‘미얀마연방’으로 개칭하였고, 2010년 11월 미얀마연방공화국으로 다시 개칭한 사연이 많은 나라이다.

인구는 6천만 명이 약간 안 되고, 전체 국민의 90퍼센트가 불교를 믿는 전형적인 불교국가이다. 높은 기후로 인해 농작물은 3모작이 가능하며, 매장되어 있는 지하자원 보유량이 세계 최고수준이다. 하지만 정부의 쇄국정책으로 인해 자유로운 무역이 불가능하다.

미얀마 역시 지구상에서 가장 열악한 환경을 가진 가난한 나라 중 하나이다. 군부에 의한 쿠데타와 오랜 강압통치로 주민들의 생활은 그야말로 처참한 지경에 이르렀으며, 정치, 경제는 물론 교육, 문화에 이르기까지 사람이 살기 힘든 환경에 놓인 최빈곤국이다.

나는 이곳에 도착해서 두 번째 ‘사랑의 학교’를 건립했다. 먼저 현지에 들어와 그곳에서 선교를 하고 있던 여의도순복음교회 파송 김병천 선교사를 만났다. 김 선교사는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님의 저서와 복음성가 등을 미얀마어(버마어)로 번역해 현지 선교에 적극 활용하고 있었다.

◆…2013년 1월 22일, 미얀마 사랑의 학교 5호 건립 기증식

그는 자신이 개척한 교회만 10여 개에 이르고 100여 명의 현지 청년들을 선교사로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그는 이 땅의 가능성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미얀마라는 나라는 참 특이했다. 환경이 아주 척박한데도 불구하고 이혼율과 자살률이 “제로”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는 군사정부의 우민정책과 윤회사상을 신봉하는 남방불교가 국민들의 삶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나라 국민들은 남이 잘 산다고 절대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는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우리나라 속담을 이곳 국민들은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이 현재 처한 삶을 모두 숙명으로 여기고 스스로 감내한다.

양곤시내 중심가에 있는 왓 프라깨우(Wat Phra Kaew: 에메랄드 사원)에는 칠십여 톤에 달하는 금으로 장식한 파고다 건물이 있는데 장식된 금을 절대 도난당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만약 이 생에서 나쁜 짓을 저지르게 되면 다음 생에는 반드시 그것을 갚아야 한다는 철저한 윤회사상이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이곳 국민들의 삶을 우리나라와 비교해 보는 ‘숙명과 감사’라는 주제로 글을 쓰고 싶다.

2009년 1월, 처음으로 이곳을 방문하던 날, 나는 앞으로 일 년에 한 번씩 매년 12월에 이 지역을 방문해 ‘사랑의 학교’를 한 채씩 지어주기로 학교 측과 약속했다. 미얀마는 연평균 강수량이 높기 때문에 대부분이 우기여서 가장 비가 적게 오는 12월과 1월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내 계획을 전해 들은 미얀마 주재 박기종 한국 대사가 찾아와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분과의 귀한 만남을 통해 매년 석성장학재단을 통해 현지 우리나라 대사관 앞으로 1만 달러의 장학금을 지원하기로 약속을 한 것이다. 

◆…2007년 5월, 반기문 총장 UN초청오찬회에 참석

얼마 후 미얀마 주재 대사가 교체되었는데, 그분도 발령을 받자마자 나에게 부임신고(?)를 한 후 앞으로도 미얀마에 많은 관심을 가져달라며 부탁을 해왔다.

그가 바로 조명제 대사(지금은 외교통상부 대변인으로 재직 중)였는데 그도 1년 후 다시 현재의 김해용 대사로 교체됐다. 나는 어느새 미얀마에서 주요 인사(VIP)가 되어버린 것이다.

매년 학교가 하나씩 들어설 때마다 미얀마 아이들이 무척 기뻐한다. 2012년 1월에 4번째 사랑의 학교를 세워줄 때는 현지 교육감이 나에게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담아 ‘우서디가’라는 미얀마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다. 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나누어주는 존귀한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2010년 1월, 북한어린이에게 보낼 우유와 분유 선적 출항식(정차영 전 연세대 총장과 함께)

하나님께서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알지 못하게 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간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미얀마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북한을 생각했다. 그리고 정창영 전 연세대학교 총장과 함께 공동대표로 있는 ‘북한 어린이에게 우유 보내기 운동’을 떠올렸다.

미얀마에서의 지난 며칠을 생각하며, 그보다 못한 환경에 놓인 북한 어린이들에게 깊은 연민이 들었다. 그리고 북한에 우유를 보내는 일에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야겠다고 결심하고 2010년 1월에 처음으로 1천 5백만 원 상당의 우유와 분유를 북한으로 보냈다.

북한 어린이들은 만성적 영양결핍으로 대한민국 어린이들보다 평균 신장은 16cm, 체중은 16kg이나 작다고 한다. 미얀마도 어렵지만, 북한 또한 동아시아 빈곤국임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먼 훗날 통일이 되면 다 우리가 껴안아야 할 아이들이다. 그날을 대비해 북한 아이들을 도울 수 있는 일을 좀 더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내가 국가와 이념, 종교를 가리지 않고 전방위로 나눔과 섬김을 행하는 데 대해 박수를 보내면서도 한편으로는 의문을 가진다.

‘저 사람은 왜 자신에게 득도 되지 않는 일을 저리 열심히 할까?’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지금 우리 사회는 온통 메말라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회를 위해 누군가가 발 벗고 나서야 합니다. 저는 그 일에 미력하나마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누군가는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그 일에 앞장서야만 우리 사회가 조금 더 아름다워지지 않겠습니까?”

이 나눔과 섬김의 문화가 알려지면 우리 사회는 좀 더 아름다운 사회로 변해갈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이제는 이 나눔과 섬김의 문화가 이 땅에 충만해지는 것이 내 마지막 남은 꿈임을 밝힌다.

소원하기는 진정한 나눔과 섬김이 더욱 확산될 수 있기를 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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