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 정치사회 > 사회

삼성을 초일류기업으로 키운 이건희 회장…한평생 '혁신' 강조

  • 보도 : 2020.10.26 06:26
  • 수정 : 2020.10.26 06:26

2014년 급성심근경색으로 쓰러진 뒤 6년간 투병
1987년 시가총액 1조원→2012년 390조원, 40배 성장
'신경영' 선언 이후 반도체·모바일·가전 사업 도약

조세일보

◆…지난 25일 별세한 고(故) 이건희 회장. 2013년 10월 서울 중구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열린 삼성그룹 신경영 20주년 만찬에 참석하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결국 내가 변해야 한다. 바꿔야 한다. 극단적으로 얘기해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야 한다"
-1993년 6월 독일 프랑크푸르트 신경영 선언 중-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25일 서울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서 향년 78세로 별세했다. 고(故) 이 회장은 한평생 위기와 변화, 혁신을 삼성그룹 경영의 기조로 삼았다. 그는 20세기 말 신경영을 모토로 삼성전자를 세계 초일류기업으로 발돋움시켰다.

이 회장은 1942년 1월9일 대구에서 삼성그룹 창업주인 고(故) 호암 이병철 삼성그룹 초대 회장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 회장은 어린 시절 부친의 고향인 경남 의령군의 할머니 댁에서 3살 때까지 자랐다.

당시 부친인 이병철 초대 회장은 대구에서 '삼성상회' 운영에 전념했고, 형과 자취 생활을 했기 때문에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기 쉽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이병철 회장이 가족과 만나는 일은 일 년에 한두 차례에 불과했다는 후문.

이러한 환경 탓인지 이 회장은 어릴 적 내성적이고 말수가 적은 학생이었다고 한다. 이 회장은 6살 무렵 서울 종로구 혜화동으로 올라와 온 가족이 함께 살게 됐지만, 3년 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다시 뿔뿔이 흩어지게 됐다.

그는 전란을 거치며 부산사범부속국민학교를 다녔고, 고학년인 1953년에는 부친의 권유로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일본에서 3년간 학교를 다닌 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에 진학했고, 연세대학교 상학과(경영·경제학과)에 입학했으나 자퇴한 뒤 일본 와세다대학교 상과대학에 진학해 1965년 3월 졸업했다. 1966년 9월에는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MBA 과정을 수료했다.

학창 시절 이 회장은 그리 눈에 띄지 않고 혼자서 사색하는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알려졌다. 이 회장과 고교 동창이었던 고(故) 홍사덕 전 의원이 한 언론과 한 인터뷰에 따르면 고교 시절 이 회장에게 무슨 생각을 그리 하느냐고 물었더니 "나는 사람 공부를 제일 많이 한다"고 답변했다고 한다.

이처럼 이 회장은 깊이 사고한 뒤 자신의 견해를 내놓는 스타일이었다. 한번은 호암이 삼성 임원을 쫓아낸 일이 있었는데, 고교생이었던 이 회장이 설득하자 부친이 그 임원을 곧바로 다시 불러들였다는 일화도 있다. 아버지인 호암도 아들인 이 회장의 식견을 존중했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이 회장은 일본어에도 능통하고, 유학생 시절에는 중고차 6대를 사 분해하고 수리해 되팔아 700달러의 이윤을 남기는 등 다방면에 재능을 보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 일자리 창출, 외자 유치, 기업 이익창출의 중요성 등 고등학생이 생각하기 힘든 부분까지 해박하게 알고 있었다.

1987년 삼성 회장 취임…'후쿠다 보고서'에 충격

조세일보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지난 25일 향년 78세 나이로 별세했다. 서울역에서 시민들이 이건희 회장 별세 관련 속보를 지켜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 회장이 삼성의 경영 일선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1966년 10월 동양방송에 입사하면서부터다. 이 회장은 1968년 중앙일보와 동양방송 이사를 거쳐 1978년 삼성물산 주식회사 부회장, 1980년 중앙일보 이사를 지낸 뒤 1987년 12월 삼성그룹 회장에 올랐다.

그는 퇴근 이후 사람들과 어울려 노는 것보다 독서나 전자제품 연구에 더 집중했다고 한다. 이 회장은 전자제품이나 기계를 분해하고 조립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길 때 전문가들을 불러 조언을 얻었다. 한 재계 인사는 이 회장에 대해 "이 회장의 서가에는 경영학 서적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 반면 이·공학 관련 서적이 많이 꽂혀 있었는데, 이 회장이 직접 한 권씩 골라 읽은 것 같았다"고 했다.

이러한 학구열로 인해 이 회장은 웬만한 전자제품의 부품 차이는 꿰고 있었고, 이는 향후 삼성전자가 글로벌 IT 기업으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됐다. 외국산 제품과 한국 제품 간 품질 차이가 나는 부품을 찾아낸 뒤 계열사 임원에게 그 부품을 건넸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

삼성그룹 회장이 된 이듬해인 1988년에는 삼성의 제2창업을 선언했다. 인간중심·기술중시·자율경영·사회공헌을 경영의 축으로 삼고, 삼성의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의 도약을 그룹의 21세기 비전으로 정했다. 이때부터 이 회장의 '신경영'이 시작됐다.

특히 이른바 '후쿠다 보고서'는 삼성 신경영의 시발점이 됐다. 이 회장은 회장에 취임한 지 5년이 된 1993년 2월 임원들과 해외 시장을 순방했다. 하지만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한 매장에서 먼지가 쌓인 채 구석에 처박혀 있는 삼성의 TV를 보고 충격을 받아 순방을 중단했다.

당시 이 회장은 세탁기의 불량 부품을 칼로 깎아 조립하는 직원이 나오는 사내 방송을 보고 격노했고, 이에 앞서 독일행 비행기 안에서는 1989년 일본에서 스카우트해 온 후쿠다 타미오 고문이 쓴 '후쿠다 보고서'를 본 뒤 큰 충격을 받았다.

'후쿠다 보고서'에는 후쿠다 고문이 제안한 의견이 삼성 조직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유에 대한 냉혹한 분석들이 들어있었고,  이후 이 회장은 바로 도쿄로 날아가 후쿠다를 만나 일본 측 고문들만 따로 소집해 밤샘 토론을 벌였다고 한다.

1993년 '신경영' 선언…"불량은 암, 철저하게 바꿔라"

조세일보

◆…지난 2010년 5월17일 경기도 화성 삼성전자 반도체 16라인 기공식에 참석한 이건희 회장이 기공 기념 시삽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권오현 사장, 이 회장, 최지성 사장, 이재용 부사장, 윤주화 사장. (사진=연합뉴스)

이후 1993년 6월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켐핀스키 호텔에서 이 회장은 이른바 '신경영'을 선언한다. 이 회장은 삼성 본사와 각국 법인장이 모인 비상경영회의에서 양적 경영에서 질적 경영으로의 근본적인 혁신을 주문했다.

이 회장은 이 회의에서 "결국 내가 변해야 한다. 바꾸려면 철저히 바꿔야 한다. 극단적으로 얘기해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야 한다"며 "불량은 암이다. 삼성은 자칫 잘못하면 암의 말기에 들어갈 가능성이 있다. 생산 현장에 나사가 굴러다녀도 줍는 사람이 없는 조직이 삼성전자이고, 3만명이 만들고 6000명이 고치러 다니는 비효율, 낭비적인 집단인 무감각한 회사다"라고 질타했다.

'신경영 선언' 이후 이 회장은 그룹 회의에서 '위기'와 '변화'를 줄곧 강조했다. "품질을 위해서라면 생산·서비스 라인을 멈추라"는 지시를 비롯해 "문제가 생기면 5번 정도는 이유를 따져보라"는 '5WHY' 사고론, "디자인과 경영은 별개가 아니다"는 디자인 경영론 등의 혁신이 이어졌다.

이러한 이 회장의 집념은 삼성을 1987년 시가총액 1조원에서 2012년 390조원대로 40배 이상 성장시켰고, 총자산 500조원이라는 성과를 올렸다.

반도체 산업의 경우 부친인 이병철 창업주를 비롯해 모두가 반대했으나 이 회장은 파산 직전의 한국반도체를 사재를 들여 인수했다. 그는 "기술 식민지에서 벗어나는 일에 삼성이 나서야 한다"며 반도체 산업을 양성해 1986년 메가D램을 본격적으로 생산해 내기 시작했다.

현재 삼성전자의 주력 산업 중 하나인 '휴대폰 사업'에도 뛰어들어 1995년 휴대전화 브랜드 '애니콜'이 당시 전 세계 휴대폰 시장 1위인 모토로라를 제치고 51.5%의 점유율로 국내 정상에 올랐다. 당시 우리나라는 모토로라가 시장 점유율 1위를 지키지 못한 유일한 나라로 알려졌다. 이후 애플을 따라잡고 스마트폰 시장 1위를 달성했다.

TV 분야 역시 2006년 일본 소니를 제치고 세계 1위를 차치하는 등 20겨개 품목에서 글로벌 1위를 차지하는 비약적인 발전을 일궈냈다.

'인사 문제'와 관련해서도 이 회장은 학력보다 실력 위주로 채용하고, 여성 인재의 중용에도 노력했다. 이 회장은 1995년 "대학 졸업장과 관계없이 입사할 기회를 동일하게 주고 입사 후 승진, 승격에도 차별이 없도록 해야 한다"며 "삼성의 입사 기준은 학력이 아니라 실력"이라고 선언했다.

자동차 실패·무노조 경영·정경유착은 '오점'

조세일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25일 오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강남구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 회장의 '신경영'은 20세기 말 삼성을 전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켰지만, 자동차 사업의 실패, 무노조 경영, 정경유착 관행 등은 사회적 논란의 대상이 됐다. 이 회장은 1995년 숙원사업이던 자동차 사업에 진출했지만 IMF 외환위기 등을 거치며 실패했고, 4조3000억원의 부채를 안은 채 1999년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무노조 경영 원칙 역시 시민사회와 노동계의 반발을 샀고, 구조조정본부·전략기획실·미래전략실 등의 그룹 내 조직을 만들어 제왕적 경영을 펼쳤다는 비판도 받았다. '정경유착'에 대해서도 자유롭지 못해 1996년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 2002년 대선 당시 한나라당의 이른바 '차떼기 사건'에 연루됐다.

삼성의 전 법무팀장인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 비리와 관련해 양심고백을 한 뒤 2008년 이 회장의 차명계좌와 1000억원대의 조세포탈 혐의가 적발됐다. 이후 이 회장은 삼성의 경영쇄신안을 내놓고 전격 퇴진했다. 그는 양도소득세 456억원을 탈루한 혐의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벌금 1100억원을 선고받았다. 2012년에는 맏형인 고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과 상속 분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 회장은 2014년 5월10일 오후 자택에서 갑자기 호흡 곤란 증세가 나타나 서울 용산구 한남동 순천향대 병원으로 옮겨졌다. 응급실에 도착하자마자 심장마비가 와 심폐소생술을 받았고, 이후 계속 삼성서울병원에서 치료받아왔다.

이후 이 회장은 재활에 힘을 쏟았지만 지속된 건강 악화로 인해 6년간의 투병 끝에 25일 오후 별세했다. 장례는 고인과 유족의 뜻에 따라 간소하게 가족장으로 진행할 예정이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되고, 장례가 끝나면 경기 용인시 에버랜드 부지 내에 있는 선영(선산)또는 수원 선산에 안장될 것으로 보인다.

유족으로는 부인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 관장, 아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딸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 사위 김재열 삼성경제연구소 사장이 있다.

관련기사

  • 출생 :
  • 소속 :
  • 학력 :
  • DID :

상세프로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