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대통령이 방아쇠를 당긴 무역전쟁의 전선이 전 방위로 확산되고 있다. 총구가 중국뿐 아니라 유럽연합(EU), 캐나다, 멕시코, 일본, 한국 등 주요 무역국가 모두를 향하고 있는 데다 전쟁양상도 '관세전쟁'을 넘어 기술․ 금융․ 통화전쟁으로 치달을 기세다.
'전면 확전은 공멸'이라는 위기감이 서로 간에 증폭되면 절충을 모색해 파국은 면할 수도 있겠지만 내연화된 무역 갈등이 보복과 맞보복, 잠시 휴전 뒤 다시 반복되는 '상시 전쟁 체제'로 장기화할 우려가 크다는 점이 문제다.
미․중 충돌은 일찍부터 예견돼 왔다. 신흥 강대국이 부상하면 기존 강대국과 갈등이 커지고, 신흥 강대국이 기존질서와 체제에 도전하며 기존 강대국의 이익을 침해할 경우 전쟁은 불가피해진다.
트럼프는 중국이 작정하고 미국을 파탄 내려 덤비고, 일자리를 앗아가고, 기술을 훔쳐 가고, 기축통화 달러의 위상을 약화시키고 있다며 이런 나라를 '적(敵)' 말고 뭐라고 부르냐고 반문한다. 중국이 휘두르는 '일자리 파괴의 무기'로 불법 수출 보조금, 지식재산권의 무분별한 위조, 느슨한 환경 법규, 업계에 만연한 노예 노동력 사용, 미국 기업에 대한 높은 중국 진입 장벽 등을 들고 “가장 뻔뻔한 것으로 환율 조작도 있다”고 열거했다.
미국은 1985년 자국을 위협하는 제2위 경제대국 일본을 '플라자협정' 한 방으로 따돌렸다. 협정체결 2년 만에 미국달러화는 50% 절하돼 제조업 경쟁력을 회복했다. 일본은 엔화 가치 급등으로 뉴욕의 고층빌딩을 사들이는 등 호황을 누렸지만 이것이 독배일 줄이야. 부동산 거품이 꺼지면서 '잃어버린 20년'의 장기침체에 빠져들었다.
당시에는 환율 한 가지 수단만으로도 큰 성과를 냈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중국이 환율 조작국 지정을 피해갈 정도로 위안화 평가절하 혐의가 노골적이지 않은 데다 대중 적자 누적의 요인도 복합적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미국의 대중 무역적자는 3752억 달러로 전체 무역적자 5660억 달러의 66.3%에 달했다. 이 적자를 2000억 달러 선으로 줄일 목표아래 맨 먼저 내놓은 것이 고율 관세폭탄이다.
관세폭탄은 무역역조 시정을 강제하는 효과가 있지만 상대방이 보복관세로 맞설 경우 모두가 지는 게임이 되기 십상이다. 중국은 물론 캐나다 호주 EU도 보복을 다짐하는 상황이다.
트럼프는 “무역전쟁은 좋은 것이다. 그리고 이기기 쉽다”고 트위트를 날렸었다. 미국이 중국시장에 파는 것보다 중국이 미국시장에 파는 것이 훨씬 많아 관세 폭탄이 똑같이 떨어지면 훨씬 더 많이 파는 쪽이 불리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논리다.
하지만 중국입장에서 대미수출은 전체 중국수출의 약 20~25%에 불과하다. 중국이 다른 나라로 수출을 다변화해 미국의 관세부과 충격을 완화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중국이 EU 등 다른 나라로 수출을 늘리고 다른 나라들이 수입급증을 우려해 고율관세로 맞서면 국가 간 관세전쟁은 연쇄적으로 이어진다. 그 결과는 승자는 없고 모두가 패자가 된다.
트럼프는 관세 카드만이 아니고 기술유출 방지를 위해 첨단기술에 대한 투자규제도 꺼내들었다. 시진핑 주석의 야심찬 '중국제조 2025'를 미국의 성장을 저해할 '신흥 첨단기술 산업지배계획'으로 규정하고 전략품목에 대한 고율관세 부과와 함께 중국기업의 미국진출 차단 등 비관세장벽까지 동원한 것이다.
무역협상을 통한 대미흑자 시정을 넘어 미국이 '중국 제조 2025'에 대한 견제와 제한을 통해 중국의 산업발전을 억제시키려는 무리수까지 서슴지 않는 상황이다.
트럼프의 미국우선 및 보호주의 논리는 미국내부에서도 비판이 드세다.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서라지만 무역전쟁으로 일자리가 되레 줄고 수입물가 상승 등으로 미국 소비자와 가정에 부메랑을 안기는 무모한 모험이라는 질타도 쏟아진다.
자유무역은 전후 미국 주도의 세계경제질서의 근간을 이루는 핵심 가치다. 이 가치보다 눈앞의 실리를 택한 트럼프의 무역전쟁은 일시적 효과를 볼 수 있겠지만 그 과정에서 미국의 위상 추락과 함께 자신의 지지자들마저 고통으로 몰아 그동안의 경제적 성공을 날려버릴 위험도 다분하다. 특히 첨단제품에 대한 고율관세부과는 중국이 조립만하고 원천기술 대부분은 미국계 다국적 기업이 갖고 있다는 점에서 자충수로 놀림 받기도 한다.
이 모든 무리수에도 트럼프가 중국과의 무역전쟁을 마다않는 이유는 미․중간 글로벌 패권경쟁 때문이다. 미국 우선주의와 중국 기술굴기의 갈등 또는 시장경제주의와 국가자본주의의 대립이란 관점에서 미·중 간 통상마찰은 구조적이다.
근년 들어 중국의 IT(정보통신) 굴기가 두드러지면서 미국이 위기감을 느꼈을 수도 있다. 실리콘밸리에 중국자본이 '큰 손'으로 등장하고 인공지능분야에서 '중국이 없으면 미국도 힘들다'는 얘기가 나도는 판이다.
미·중 관세전쟁은 무역전쟁의 서막에 불과하며, 왕년의 플라자협정 같은 화폐전쟁으로 비화될 시나리오도 배제하지 못한다. 관세전쟁이 재래식 전쟁이라면, 화폐전쟁은 핵전쟁에 해당한다. 화폐전쟁이 벌어진다면 일본의 경우와는 반대로 강(强)달러 양상이 전개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감세정책과 계속적인 금리 인상으로 해외의 미국 달러를 본토로 빨아들이면 이 과정에서 중국을 비롯한 신흥 개발도상국의 환율이 급락하게 된다.
위안화 가치급락으로 중국 내 달러 자금이 대거 빠져나가 부동산 거품이 터진다면 중국 경제가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겪지 말라는 법도 없다. 중국의 수출과 투자가 위협이라고 판단되면 트럼프는 언제든 화폐전쟁 카드를 꺼내들 수 있다는 얘기다.
사실 미국의 무역적자는 나라 전체로 저축보다 소비가 많고, 안전자산을 선호해 미국에 몰려드는 세계 각국의 투자가 이를 지탱해주는 구조여서 관세전쟁과는 관계가 없다.
그럼에도 트럼프는 미국이 더 이상의 '봉'은 안 된다며 무역문제에서 '공정한 대우'를 요구하고 힘을 앞세운 양자협상을 통해 게임의 룰을 다시 쓰자고 무역상대국들을 윽박지르고 있다. 국제통상질서가 바야흐로 대 혼돈에 빠져들고 있다.
미․중 무역전쟁은 전략적 갈등구조로 보아 앞으로 우리에게 변수가 아닌 상수(常數)로, 세계통상질서를 바꿀 '게임 체인저'(Game Changer)로 다가오고 있다. 당장 우리 수출에 큰 타격이 불가피하지만 미국과 중국시장의 성장에 기대 온 우리의 통상전략을 과감하게 전환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중국 EU 등과 자유무역 체제 수호를 위한 국제공조에 적극 동참하면서 트럼프리스크에 대한 선제대응과 다변화 전략을 서둘러야 한다. 미국의 압박으로 신흥국들이 통상·투자 여건을 개선하면 새로운 시장접근 기회가 열릴 수도 있다. 3대 수출국이자 최대 투자국인 베트남과 인도 등으로의 지역 다변화와 함께 중국에 대한 중간재 중심의 수출구조를 소비재 등 분야로 다변화하는 새로운 통상전략을 마련할 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