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자랐던 고향은 지금과는 완전 다른 주거환경이었다.
학교에서 집에 도착하려면 여러 골목길을 지나야했고 잠시만 동네를 벗어나면 야트막한 야산 길이 있었다. 매일 소풍이었고 요즘 유행하는 올레길이나 둘레길이었다.
또 다른 점은 어느 집이나 자신만의 대문이 있고 마당이 있다 보니 친구 집의 대문 크기나 형태에 따라 그 집의 경제력이나 사회적 신분을 알 수 있었다. 간혹 잘 사는 친구 집에 갔을 때 느껴지는 그 양옥집 철문의 위엄에 열 살 소년은 지레 주눅이 들곤 했다.
말단 공무원이셨던 아버지는 낡은 나무 대문에 때가 되면 페인트칠을 하셨다. 덕분에 우리 집은 그나마 동네에서 깨끗한 문을 가진 집으로 우리 부모님의 성품을 동네사람들에게 무언중 알리는 역할도 했다.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집도 철대문이 있는 단독주택을 지어 이사하게 되었다. 너무 기쁜 나머지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하교시 몇 달 동안은 열쇠가 있었지만 초인종을 눌러 주무시는 어머니를 깨우곤 했다.
그리고 지금과는 확실히 다른 점이 한 가지 더 있었다.
바로 집집마다 집 주인이름이 적힌 명패가 걸려 있었다는 점이다. 지금은 몇 십억원하는 아파트에도 없는 명패가 그 당시엔 다 쓰러져가는 집에도 꼭 붙어 있었다.
그 당시 우리의 아버지들은 대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얼마나 뿌듯했을까. 그런 문화가 요즘 사라진 것이 아쉬운 것은 나 뿐만은 아닐 것이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가난하였지만 그래도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이 밭이나 논 한 뙈기라도 자신의 이름을 걸고 사고팔거나, 아파트가 아닌 대부분 단독주택에 살며 자신의 명패를 걸었던 문화 때문은 아닐까?
공부도 자신만의 이름을 걸고 해야 당당해지고 자기확신이 서게 된다.
이번에 2차를 처음 보는 초시생이거나 나처럼 5번을 본 장수생도 각자의 수준에 맞게 당당해질 필요가 있다. 처음 경험한다고 주눅들 필요가 없고 스스로 연속된 자신의 불운에 위축될 필요도 없다.
자신만의 대문 안으로 힘차게 들어가면 된다. 어차피 바로 그게 자신이고 현실이니 말이다. 부러운 양옥집 철문을 아무리 두드려봤자 열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신의 집이 아니니까. 남의 집 문을 잘못 두드렸다간 파출소에 갈 수도 있다. 그렇게 앞으로 남은 100여일 동안 자신만의 이름표를 단 각자의 대문을 만들어보자.
그게 바로 시험 당일 자신이 박차고 들어갈 문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