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 속의 섬' 비양도…바다공원 즐기고 화산 봉우리 오르면 한라산이 한눈에

어느 금요일 아침 출근길에 푸른 바다가 보고 싶어 마지막 비행기표를 예약하고 퇴근길을 김포로 달려 제주로 날아온 적이 있다.

그렇게 찾아온 밤바다는 검은 색이지만 푸른 냄새가 났다. 

제주는 그렇다.

자주 올수록 언제 어떻게 누구랑 떠날 것인지 고민할 필요 없이 그냥 가고 싶을 때 비행기 표가 있다면 올 수 있는 곳이다.

한나절 구름을 벗 삼고 바람을 앞세워 걷다 지치면 푸른 바다 방석을 깔고 앉아 싱싱한 회 한 접시에 파란색 하늘과 초록의 싱그러움을 뚝 뚝 떨어뜨린 된장 양념에 콕 찍어 한입 씹어 삼키는 달콤함이 좋다면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다.

여행은 아름다운 자연, 특별한 음식이 필수요소라면 새로운 환경과 이국적인 삶을 들여다보는 것은 선택이다.

바다에는 늘 새벽을 깨우는 사람들이 있다.

이른 새벽 한림항은 가까운 바다에서 조업을 끝낸 어선들이 하나둘 들어와 그물채 고기를 부리느라 분주하다.

손질이 끝난 고기들은 어판장으로 모여 경매가 이루어진다.

한림 어판장의 고기 종류만 보아도 바다는 보물단지가 틀림없다. 그중 길고 가늘지만 단단한 몸통에 온통 은빛으로 반짝이는 제주갈치는 더욱 귀한 대접을 받고 있다.

한림항 어판장에서는 경매가 끝나면 일반인들도 생선을 살 수 있다. 물론 경매가에서 웃돈을 얹어주고 사야하지만 제주사람들은 잔치에 사용하거나 행사에 쓰일 싱싱한 횟감과 갈치 등을 이곳에서 박스 단위로 구입한다.

겨울이면 상처가 난 조기들을 저렴한 가격에 살 수도 있다.

도심에서 볼 수 없는 새벽 삶의 현장은 경이롭기도 하지만 작은 위로가 될 때도 있다.

제주도 본섬에서 또 다른 섬으로 떠나 사는 사람들은 제주도가 육지다.

비양도에서 만난 사람이 들려 준 이야기다.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한림해안로 146, 바로 앞에 보이는 작은 섬 비양도는 천 년 전 바다에서 날아왔다고 한다.

비양도는 고려시대(목종 5년)인 1002년 6월 바다 한가운데에서 산이 솟아 나와 산꼭대기에서 4개의 구멍이 뚫리고 닷새 동안 붉은 물이 흘러나온 뒤 그 물이 엉키어 두 개의 분화구가 있는 지금의 섬으로 형성됐다고 한다. 물론 지질학자들의 견해는 다르긴 하지만 천년이야기가 쉽게 머리에 와 닿는다.
 

협재에서 비양도는 거리가 불과 3km 밖에 되지 않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어 언제든지 쉽게 갈 수 있다.

한림항에서 매일 9시 12시 3시 운항하는 도항선 배를 타고 5km를 15분 정도 가다보면 작은 포구가 나온다.

잠깐 동안이지만 배를 타고 작은 섬으로 향하는 기분은 낯선 곳에 대한 막연한 설렘과 파도를 거슬러 가는 배와 한 몸이 되어 바다를 용감히 헤엄쳐 가는 것 같다. 포구에 도착해 선착장을 지나 오른쪽 골목으로 향하면 비양도에 단 하나 뿐인 구멍가게가 있다. 비양도에 거주하는 인구가 불과 100명 남짓하다고 하니 이 가게는 관광객들의 편리를 위해 열고 있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가게 주인아주머니가 비양도에서 꼭 먹어봐야 할 음식이 보말죽이라고 일러 주신다. 해산물이 풍부하고 주민 대부분이 어업에 종사 하고 있는 이곳이지만 고기를 잡아 한림으로 나가 팔기에 맛있는 자연산 회를 먹고 싶다면 비양도에 들어오기 전에 미리 예약을 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니 제주도 어디서든 먹을 수 있는 회지만 더 입맛을 당기게 한다.

가게 앞을 지나 서쪽으로 걸어가면 자그맣고 예쁜 초등학교 분교가 있다. 전교생 3명밖에 안 되는 학교지만 비양도를 지키고 있는 그 어느 것보다 더 아름답다.

어른 들 눈에는 한걸음 밖에 안 되는 운동장이지만 아이들에게는 함께 뛰어 놀고 꿈을 키워가는 잊지 못할 큰 교정일 것이다. 학교를 지나 해안도로를 따라 걷다보면 작은 섬 속 큰 호수 같은 펄랑못이 갈대 숲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다. 염습지로 알려진 펄랑못은 비양봉 아래 갈대숲이 우거진 사이로 긴 표주박 모양으로 펼쳐져 있다. 그냥 자연 그대로 두어도 아름다울 법한데 애써 손을 대다만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리로 계속 해안을 따라 걷다보면 바다에 펼쳐지는 자연 예술을 볼 수 있다.
 

새들이 모여 사는 작은 섬과 용암이 솟아 흘러 내려 굳어진 바위들은 사람과 동물의 형태를 하고 바다 가운데서 이야기를 나누는 듯하다. 다양한 바위들에 눈을 떼지 못하고 걷다 보면 발길은 어느새 비양봉을 오르는 산책길로 접어든다. 비양나무의 자생지로 알려진 비양봉 분화구 비탈길에서는 아기 염소들이 풀을 뜯고 있다.

20여 분을 걸어 오르는 비양봉 산책로에는 가는 산죽이 오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엿들으며 긴 터널을 만들어 내고 있다.

산죽 옆에는 먼 바다를 건너온 송화가 돌 틈에 뿌리내리고 오랜 세월을 해풍에 견디며 자라난 소나무 몇 그루가 겨우 자리잡고 있다.

갔던 길을 되돌아 내려와 마을로 향하면 마을 주민들의 크고 작은 텃밭에는 풋마늘과 양파 등 겨울을 이겨내는 채소들이 자라고 있다.
 

이렇게 눈으로 보며 비양도를 한 바퀴 걷는 시간은 두 시간 남짓 소요된다.

한림항에서 9시 배를 타고 비양도에 도착해 아침을 먹고 두세 시간 산책 후 회 한 접시에 현지 사람들과의 오고가는 이야기를 곁들이면 그야말로 일품 여행이랄 수 있다.

꾸미지 않은 섬, 꾸밈없는 사람들이 사는 곳 비양도가 날아오르는 이유가 그것이다.

다시 한림항으로 돌아오는 뱃길을 비양도가 아쉬워 계속 따라온다.

해마다 길어지는 불볕더위의 여름은 일 주일간의 휴가로 이겨내기에 역부족이다.

유럽 여행을 할 때처럼 긴 휴가가 주어진다면 제주도 한 달 살기라도 해 보겠지만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그나마 언제든지 자유롭게 떠날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제주도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더위에 지친 몸과 마음을 위로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