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길진 칼럼] 궁터의 저주에 불심의 원망까지 보태 폐위
연산군은 조선왕조 역사상 드물게 세자궁에서 태어나 왕이 됐다. 왕이 되는 정통코스를 밟은 셈이다. 그러나 연산군은 풍수를 무시하고 정궁(正宮) 경복궁을 놀이터로 과감하게 개조하다 불행을 맞이하였다.
연산군은 1476년(성종 7)에 태어나 1506년(중종 1) 강화도 교동에서 31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즉위 후 3년 동안은 선왕 성종처럼 정사에 힘썼다. 그러나 부친 승하 직후 밝혀진 친모 폐비 윤씨의 존재로 그는 폐주의 길을 걸어갔다. 정사를 멀리하고 경복궁을 놀기 위한 리조트로 개조했다.
경복궁에 있던 보루각을 창덕궁으로 옮기고 간의대를 없앴다. 경회루 연못에서 뱃놀이를 즐겼고, 연못가 만수산에는 봉래궁, 일궁, 월궁, 훼주궁을 지어 오색찬란한 비단으로 꽃을 만들어 장식한 뒤, 못 속에는 금은보화로 산호림을 만들어 세웠으며 물 위에는 황룡주를 띄웠다.
연산군은 대궐 담장을 새로 두 길 높이로 쌓아올리고 담장 밖 민가들을 모두 헐어버렸다. 대궐 안을 내려다보는 높은 곳에 위치한 복세암, 인왕사, 금강굴도 철폐했다. 인왕산에는 백성의 입산을 엄금했다. 노는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탑골공원 경내의 대원각사비도 연산군의 폭정을 방증하는 사료 가운데 하나다. 공원 터는 고려시대 흥복사(興福寺) 자리다. 조선 7대 왕 세조가 숙부인 효령대군의 신앙심에 감격, 이곳에 있던 관아(官衙)를 모두 딴 곳으로 옮기고 1464년(세조10) 유림의 반발을 무릅쓰고 원각사를 지었다.
그러나 연산군은 원각사 본당의 불상을 성 밖으로 내보냈다. 승방은 자신의 잔치에 동원되는 기생들의 숙소로 썼다. 궁터의 저주에 불심의 원망까지 보태졌으니 연산군이 무사할 까닭은 없었다. 연산군 폐위 후 원각사는 한성부 관사로 활용됐다. 그런데 관사의 수장이 돌연사하는 괴변이 잇따랐고, 결국 관사는 폐해지기에 이르렀다.
한(恨)이 서린 땅은 공원이나 문화공간으로 용도를 변경해야 탈이 없다. 탑골공원은 잘 들어섰다. 3.1 독립선언이 공연히 탑골공원에서 이뤄진 것이 아니다. 연산군은 비원도 망쳤다. 당시 후원, 북원, 금원(禁苑)이라 불리던 왕실전용 가든이다. 왕과 왕비, 왕족의 휴식공간이던 비원을 1497년 연산군은 음란 파티장으로 변질시켰다. 보다 못한 인왕산 호랑이들까지 종묘에 출현, 호환(虎患)을 일으켰을 정도로 연산군의 패악은 끝이 없었다.
여성편력도 기상천외했다. '흥청망청'이란 말은 연산군 때 나오는데, 이때 흥청(興靑)은 궁에 들인 여인들을 높인 말이다. 채홍사(採紅使), 채청사(採靑使)를 파견해, 조선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과 건강한 말을 뽑아 각 고을에서 관리했다. 기생의 명칭도 운평(運平)이라 했다. 궁중에 들어가면 흥청(興靑)이라 불리며 신분이 올라갔는데, 잠자리가 임금의 마음에 들면 천과(天科)흥청, 그렇지 못하면 지과(地科)흥청, 이도저도 아니면 반천과(半天科)흥청이라 불렸다.
흥청과는 3백 명, 운평과는 7백명에 이르렀으니 무려 1천여 명의 여자를 거느린 것이다. 부친의 후궁인 남씨, 큰어머니 월산대군 부인과 추문이 돌기도 했다. 특히 월산대군 부인 박씨에게 '승평부대부인'이라는 호를 내린 연산은 그녀를 특별히 아꼈는데, 훗날 인수대비의 명으로 그녀가 죽자,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생겨 자살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에 화가 난 박씨의 남동생 박원종이 1506년 중종반정을 일으켜 연산을 폐위시키는데 일등공신이 된다.
연산군을 폐위시킨 중종 때 동궁에 불이 났고, 명종 8년(1553)에도 경복궁에 큰 불이 나 강녕전(康寧殿), 사정전(思政殿), 흠경각(欽敬閣)이 잿더미가 됐다. 선조 25년(1592) 4월 임진왜란이 또 다시 경복궁을 화염에 휩싸이게 했다. 이때는 해태상도 막을 수없는 경복궁 터의 화염은 모든 것을 녹여버려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