짭쪼름한 섬 바람, 긴 역사·아픈 세월 깨우다

탐라의 옛 도읍지를 가다 (제주공항~별도봉)

조각가가 빚었나 '전설의 용두암'

제주도 푸른 바다는 누군가에게는 설렘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그리움이다. 설렘이든 그리움이든 제주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여행 짐을 꾸리게 만들었던 바다는 봐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 이곳을 찾는 여행자들의 심정일 것이다.

제주공항을 동쪽으로 끼고돌아 10여 분 걷다보면 거리 끝에 바다가 보인다. 길 끝이 마치 낭떠러지처럼 바다가 저 아래 보이는 것이 언제 보아도 이국적인 도로다. 

사대부속중학교가 있는 방향으로 해안도로를 걷다보면 검은 바위들과 푸른 바다는 누군가를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걸어온다. 그 길 끝에는 용이 한라산의 구슬을 훔쳐 승천하려다 산신의 화살에 맞아 바다로 떨어졌다는 설과 용왕의 신하가 불로장생을 구하러 한라산을 올랐다가 산신에게 화살을 맞아 바다로 떨어져 몸은 바다로 가라앉고 머리만 남았다는 설 등이 전해져 오는 용두암이 있다. 지금은 파도에 깎이어 조금 초라한 모습이기는 하나 입을 벌리고 있는 용의 머리 모양은 어느 조각가도 빚어낼 수 없는 예술이다.

용두암 전망대에서 멀리 보이는 무인섬은 추자도와 서울의 중심선을 말해준다. 그래서 제주도에 유배를 오면 이곳에서 임금을 향해 절을 하고 탈 관직을 했던 곳이라고 하니 용두암이 그냥 예사로이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날씨가 좋으면 계단으로 아래까지 내려가 해녀들이 물질해 잡아온 해산물을 맛 볼 수 있는 곳이다. 목욕탕 플라스틱 의자에 쪼그리고 앉아 파도소리 들으며 소주 한 잔 기울이면 방금 전까지 맡았던 도시의 냄새는 짭쪼롬한 바다맛과 함께 사라지고 만다.  

용두암을 가로 질러 걷다보면 용의 연못이라 불리는 제주12경 중의 하나인 용연을 만날 수 있다. 옛 선인들이 달 밝은 밤이면 이곳에 배를 띄워 시를 읊고 풍류를 즐겼다고 하니 지금도 아름다운데 당시엔 얼마나 더 아름다웠을까 싶다. 용처럼 굽이쳐 흐르는 물은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 에메랄드빛을 낸다. 이곳은 봄부터 가을까지 아름다운 야경을 즐기며 산책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용연을 중심으로 동쪽은 동한두기, 서쪽은 서한두기라 불리는데 '한두기'는 제주 말로 큰 언덕이라는 뜻이다. 용연의 다리 위에 서서 바라보면 아래 물빛과 절벽, 나무들이 어우러진 경치를 따라 바다가 이어져 보인다. 아름답다는 표현을 그냥 붙이기에 더한 형용사를 찾아야만 할 것 같다. 시간의 여유만 있다면 배를 타고 달빛 아래 빛나는 용연의 물빛을 감상해볼 일이다.

서한두기 윗마을은 서울예술의전당 고학찬 사장이 나고 자란 곳이다. 학교 교실이 없어 늘 바다에서 선생님과 노래를 불렀던 기억을 지금도 이야기하고 계신다. 이렇듯 제주도는 예술가들에게는 바다가 스승이고 바람이 친구다. 

공자 등 39 성현이 모셔진 대성전

다시 발길을 옮겨 얼마 전 국보로 지정 예고된 대성전이 있는 제주향교를 찾아보자. 양반(?)은 항상 오른쪽 문으로 출입을 해야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향교를 들어서면 밖에서 보는 것과 달리 넓은 명륜당과 돌담길을 따라 대성전까지 멋들어지게 지어진 건축물, 당당하게 서있는 소나무를 만나게 된다. 국가보물로 지정받은 건축물인만큼 생김새와 유래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나이 지긋한 문화해설사로부터 들을 수 있다. 

제주의 바람을 잘 이겨내도록 지어진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한 39성현이 모셔져 있다. 매달 음력 초하루와 보름에는 제를 지내고 있다. 누구에게나 개방하는 곳이지만 아이들이 뛰어 놀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제주향교를 들어서는 문은 겸손을 가르치기 위해 작고 나지막하게 지어졌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 스스로 달라져 있는 모습에 놀랄 수밖에 없다. 예전에는 관덕정 가까이에 있었으나 200년 전 쯤 이곳으로 옮겨 왔다고 한다. 

쇠고기· 돼지고기가 유명한 서문시장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제주 향교를 나와 100미터 쯤 아래로 내려가 길 건너 자리한 서문공설시장으로 가보자. 이 시장은 정육점에서 쇠고기와 돼지고기를 사서 가까이에 있는 식당에서 먹을 수 있는 곳이다. 다른 재래시장과는 달리 고기로만 유명해 많은 식당과 정육점들이 모여 있고 가격도 저렴해 도민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이곳에서 고기를 포장해 서울이나 타 지역에 택배로 보낼 수도 있다. 품질이 믿을 수 있으며 공항이나 타 관광지보다 많이 저렴한 것이 특징이다.  

제주목 관아가 있었던 무근성지

서문시장 옆에는 옛 탐라국의 성터가 있다. 서문사거리에서 탑동로와 관덕로 안쪽 마을이 바로 탐라국 시대에 고(高), 문(文), 강(康)의 옛 부호가 살았다는 곳이다. '무근성'이라는 성지는 지금은 표식만 남아 있지만 옆에 제주목 관아가 있었던 옛 제주도의 중심부였던 터이다. 구불구불한 밧돌담을 지나 벽화가 그려져 있는 골목, 오래된 나무 대문이 보인다. '묵은성'이란 제주어로 지나간 옛 성이라는 뜻이다. 조선시대 새 성곽을 쌓으면서 '엣성지'라는 이름으로 남아 지금도 이 동네를 무근성이라 부르고 있다. 

무근성길을 따라 걸으면 제주목 관아의 돌담길이 보인다. 나지막한 돌담은 목관아의 내부를 한눈에 들여다 볼 수 있다. 도둑이 없는 곳이라 대문이 없다는 제주도는 지금도 담벼락의 높이를 어른 키보다 낮게 쌓는 곳이 많다.

목 관아에 들어서기 전 왼편에 보이는 관덕정(觀德亭)은 제주 현존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며 제주도민의 애환의 역사가 숨 쉬고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도민들은 외세에 맞서기 위해 활 쏘는 법을 배우고 싸우는 법을 익혔다.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어 장이 서는 등 제주도의 중심부 역할을 해왔다. 일본인들에 의해 처마가 잘려나가는 수모를 겪기는 했으나 늠름함은 여전하다. 

제주도의 중심 관청이었던 제주목 관아는 일제 강점기에 훼손된 이후 1999년부터 2002년까지 도민들에 의해 새로 지어졌다. 옛 모습을 토대로 다시 건축된 관아는 제주에 선정을 베풀었던 목사들의 행적과 제주의 유물과 유적 등이 간직돼 있다. 제주목 관아에만 유일하게 있는 망경루는 멀리 서울을 향해 임금의 은덕을 기리고 또 왜구의 침입을 볼 수 있도록 높이 지어졌다고 한다. 

목관아 뜰을 돌아보면 귤밭이 보이고 목사들이 거문고를 타고 시를 지었다는 귤림당이 눈에 들어온다. 역사는 흐르지만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 그래서 기록은 중요한 것일까. 

중앙로, 구 도심 문화예술의 거리로 변모

제주도의 옛 성을 뒤로 하고 길을 건너 구 도심 문화예술의 거리로 바뀌고 있는 중앙로로 향해보자. 자그마한 갤러리와 카페 등이 자리잡은 곳. 문화 예술을 꿈꾸는 이주민들과 도민들이 50~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 과거의 찬란했던 흔적을 찾아내고 있다.  

그 거리에는 시인 박목월의 흔적도 남아 있다. 전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던 시절 유부남이었던 박목월은 자신을 사랑하던 여대생 제자와 함께 제주도로 도피한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시인의 부인이 찾아와 한복 두 벌과 생활비 봉투를 내밀고 떠나자 여대생이 통곡하며 울었다고 한다. 

얼마 후 여대생 아버지가 찾아와 고향인 부산행 배에 딸을 태우고 떠나자 떠나가는 배를 바라보며 고개를 떨구던 박목월은 이별의 노래(..기러기 울어 에는 하늘 구만리/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로 당시의 마음을 토로했다. 

이를 보던 제주도의 친구 양중해 시인이 떠나가는 배(저 푸른 물결 외치는 거센 바다로 떠나는 배/내 영원히 잊지 못할 님 실은 저 배는 야속하리/날 바닷가에 홀로 남겨두고 기어이 가고야 마느냐...)를 써 두 사람의 애절함을 노래했다.

당시 박목월이 들렸던 책방 '우생당'은 지금도 중앙로 사거리에 자리하고 있다. 여대생과 함께 지낼 때 쓴 '배경'이라는 시가 제주도의 아름다움을 말해주고 있다. 

남문터와 오현단 그리고 동문시장

언덕길을 따라 오르면 제주의 옛 성지였던 남문터가 보인다. 담벼락을 따라 걸으면 다시 세운 성곽이 보인다. 제주도의 돌쌓기와 육지의 돌쌓기가 다른데 이곳은 육지의 돌쌓기 기법으로 복원이 되었다. 우리나라 문화재 복원사업의 문제점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성지 오른쪽은 귤밭이 있던 곳으로 그 아래에 제주 오현(김정 김상헌 정온 송시열 송인수)단이 있다. 이들 오현을 기리기 위한 조두석은 작고 초라한 모습이어서 보는 이의 마음을 숙연하게 만든다. 

오현길을 따라 내려오면 제주도에서 가장 크면서 매일 열리는 동문시장이 있다. 오일마다 열리는 장터와 달리 이른 새벽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불빛을 밝힌다. 요즈음 외국인들도 자주 찾는 유명 관광지가 되어 버린 탓에 늘 많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제주도의 빙떡, 오메기떡, 제주도 순대 등 토속음식과 먹거리가 즐비하다. 동문시장은 출입구가 여럿이므로 어느 방향으로 나갈 것인지 미리 알아둬야 길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수산물 시장 입구로 나가면 중앙로지하상가를 만날 수 있다. 제주의 유일한 지하쇼핑상가로 외국인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이다. 이 길을 건너면 칠성로 쇼핑타운이 탑동과 길게 연결된다. 제주도의 패션 중심지였던 이곳은 오래된 맛집과 재미난 관광상품, 아트제품 등 다양한 볼거리와 개성있게 꾸며진 게스트하우스들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 거리에서는 주말마다 벼룩시장이 열리기도 한다. 칠성로를 지나 바다를 메워 만든 탑동해변을 돌아 지금 한참 공사 중인 산지천 광장 위편에 자리한 기상청이 있는 자리까지가 옛 제주 도읍의 성곽이 있던 곳이다.  

제주 12경 중 하나 사봉낙조

옛 도읍지를 살짝 벗어나 오름을 한번 올라보자. 제주 12경 중 하나인 사봉낙조(紗峰落照)는 사라봉에 올라 바라보는 저녁노을을 말한다. 산지천에서 걸어 제주항 쪽을 돌아 올라가면 사라봉 입구가 보인다. 사라봉은 노약자도 쉽게 걸을 수 있을 만큼 완만하게 둘레길로 오르게 만들어져 있다. 오르다 보면 멀리 바다도 보이고  또다시 숲이 보이고 또 걷다보면 정상에 오르게 된다. 사라봉은 아름다운 저녁노을을 바라보다 해가 지면 제주의 야경을 즐길 수도 있는 곳이다. 사라봉은 별도봉과 연결해 걸을 수도 있다. 제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트래킹 코스이기도 하다. 

사라봉 북쪽 아래는 산지등대가 있다.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는 자녀가 있다면 주말에 가족과 함께 체험숙박이 가능한 곳이다. 무료 숙박이며 부산해운항만청 홈페이지에서 신청하면 추첨해 선발한다. 

이밖에 제주도 삼성인 고.부.양의 탄생신화 유적을 갖고 있는 삼성혈과 제주도의 문화유물을 간직한 민속자연사박물관은 오현단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다. 

또 조선 후기 홍윤애의 목숨을 건 순애보가 전해지는 벚꽃길 전농로, 제주토속 순대국밥집이 모여 있는 보성시장, 새벽이면 수산물 시장이 열리는 서부두 수산시장도 제주 구도심의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어 한 번쯤 둘러볼 만하다.  

제주도와 얽힌 수많은 사람들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는 바람에 날려 돌담 사이에 머물고 탐라의 긴 역사와 아픈 세월의 흔적은 비에 젖어 돌담에 이끼가 되었다. 옛 도읍지를 이렇게 걷다보면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제주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게 된다.

이경화 칼럼니스트(제주시대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