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시장 개방 여부를 두고 20년간 미루고 고심해 온 정부가 마침내 내년 1월1일부터 쌀 시장을 전면 개방키로 했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1994년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 이후 쌀에 대한 관세 예외가 인정돼 지난 20년간 두 차례 수입개방 유예조치를 받아왔다. 그 기한이 금년 말로 끝난다.
다시 유예조치를 받으려면 의무수입물량이 배 이상 늘어나게 돼, 재정적 부담과 쌀 과잉 등 후유증을 감당키 어렵다. 차라리 고율의 관세를 붙여 수입을 개방하는 것이 국익에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관세화를 통한 쌀 시장 개방을 정부가 선언함에 따라 9월말까지 WTO에 이를 공식통보하고 수입쌀에 매길 최종 관세율을 제시해 WTO 회원국의 검증과정을 거치게 된다. 검증기간이 보통 3개월인 점을 감안하면 쌀 수입은 내년 1월부터 가능하게 된다.
쌀 재배농가 등 농민단체들은 "식량주권이 달린 문제"라며 수입개방에 크게 반발하고 있다. 쌀 시장개방을 위한 최종 의견수렴을 위해 정부는 지난달 20일 공청회를 개최했지만 정부와 농민단체들 간에 이견만 확인했다.
농민․시민단체들은 정부가 현상유지 내지 또 한 번의 유예화 시도 등 협상도 해보지 않고 시장개방을 선언한 것은 '자충수'를 둔 것이라고 힐난하고, 설령 관세화를 해도 고율관세를 부과하지 못하면 국내 쌀 생산기반은 붕괴할 수밖에 없다며 극한투쟁도 불사하는 분위기다.
1994년 이후 20년 동안 국민 1인당 쌀 소비량은 꾸준히 감소했지만, 의무수입 물량은 매년 늘어났다. 그 결과 올해 쌀 의무수입량은 지난해 국내 쌀 생산량 423만t의 9.7%에 해당하는 40만8천700t까지 불어났다.
WTO 159개 회원국 가운데 쌀 시장을 개방 않고 있는 나라는 우리와 필리핀 밖에 없다. 일본과 대만은 일찌감치 관세화로 돌아섰다. 쌀 개방을 미뤄온 필리핀은 WTO와의 협상 끝에 2017년까지 쌀 개방을 다시 유예하는 대신 의무수입물량을 연간 35만t에서 2.3배인 80만5천t 으로 늘리기로 했다.
같은 조건으로 우리가 쌀 개방을 연기한다면 의무수입물량은 국내 쌀 생산량의 22%인 94만t에 육박하게 된다. 의무수입물량을 더 늘렸다간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 된다는 데에는 정부와 여야, 농업계 모두 이견이 없다.
의무수입물량을 추가로 늘리지 않고 현재 상태로 버텨보자는 주장도 있다. '제2의 우루과이라운드'인 도하개발어젠더(DDA)협상이 원활히 진행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DDA가 타결될 때가지 정부가 쌀 개방 유예를 밀고 나가야한다는 논리다.
하지만 쌀 협상의 근거인 우루과이라운드와 DDA는 별개이며, 한국의 현상유지 행보를 선진국들이 용인할 리 없다며 정부는 난색이다. 따라서 의무수입량의 대폭 확대를 조건으로 다시 유예를 받던지 아니면 수입을 전면 개방하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방안이 없는 상황이다.
현실적으로 중요한 것은 개방의 충격에 대비한 안전장치다. 시장을 개방하면 300∼500%의 높은 관세율을 적용할 수 있고 그럴 경우 수입쌀 가격이 국산 쌀 가격보다 비싸져 수입쌀이 시장에서 발붙이기 어려울 것으로 정부는 내다본다.
하지만 자유무역협정(FTA)이나 환태평양경제동반자(TPP) 협상 등을 통해 관세율을 낮추거나 관세를 아예 폐지하는 현재의 국제적 흐름 속에서 고율관세를 우리가 언제까지 지속시킬 수 있을 것인가가 우선 문제다.
정부는 FTA·TPP 협상에서 쌀을 양허(관세철폐 또는 인하) 대상에서 제외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수입물량이 급증하면 긴급특별관세를 매긴다고 호언하고 있지만 고관세정책으로 가격경쟁력을 지키겠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일본과 대만은 400-500%의 고관세정책으로 시장개방에 성공했다. 일본은 개방 15년이 지났어도 수입되는 쌀은 400t 정도로 0.004%에 불과하고, 대만 역시 2003년 개방 후 수입물량은 연간 500t에 불과하다.
특히 일본의 성공은 고관세정책때문만이 아니고, 개방에 앞선 유예기간동안 그들만의 방식으로 자국 쌀을 브랜드화하고 체계적 준비를 통해 경쟁력을 키워온 결과라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쌀에 대한 품질연구는 물론 수확․도정․유통 전 단계에 거쳐 쌀 생산의 경쟁력을 향상시키고 유통시스템 표준화와 품질등급화를 통해 일본쌀이 가장 좋은 고급 쌀이란 이미지를 구축한 것이다.
그렇다면 지난 20년의 유예기간동안 우리는 쌀시장개방에 대비해 과연 무엇을 준비해왔는가를 자문(自問)하지 않을 수 없다. 정부는 농산물 개방 피해 보전에 초점을 맞춰 1990년대 중반 이후 200조원이 넘는 재정자금을 쏟아 부었지만 농업 경쟁력은 나아진 게 없다. 오히려 농가 부채는 3배로 늘었고 도시·농촌의 소득 격차도 커졌다.
근년 들어 국내시장에는 '명품 쌀'등 다양한 기능성 쌀들이 등장하고 있지만 품질평가에 과학적․기술적 접근이 부족하고 공신력을 뒷받침할 만한 기준체계도 미흡한 상태다. 시장개방에 앞서 우리 쌀의 미래를 만들고 중국 등에 한국의 고품질 쌀을 수출하겠다는 적극적 전략도 갖추었어야 했다.
쌀 관세화가 시간문제였는데도 유예종료가 임박한 시점에야 쫓기듯 이를 결정해 WTO와의 관세율 협상에서 불리한 입지를 자초한 점도 없지는 않다. 전문가나 농업계는 최소 400% 이상의 관세율이 책정돼야 시장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 것으로 보지만 미국만 해도 한국에 쌀 관세율 200% 이하를 요구하는 것으로 알려져 이 또한 쉽지 않을 전망이다.
긴급특별관세는 우리만이 휘두를 수 있는 '보검'은 아니다. 수출국이 다른 부문에서 보복조치를 취할 가능성이 높고, 긴급특별관세가 발동될 상황이 되면 이미 시장 자체가 위기에 처한 뒤가 될 것이기 때문에 확실한 안전장치는 못 된다.
쌀 관세율을 절대 건드리지 않겠다고 정부가 큰소리만 칠 게 아니라 관세화 이후에도 쌀농사를 유지할 수 있는 대책과 희망을 국민에게 제시해야 한다. 농가 지원과 쌀 산업 발전대책을 놓고 농민 등 이해당사자들과 충분한 대화로 협의․설득하고, 장기적 식량안보문제도 치밀하게 검토해 최종안을 내놓아야 한다.
중국 고소득층을 겨냥해 국내산 농산물을 수출전략 상품으로 키우는 등 쌀 시장 개방을 계기로 우리 농업을 신성장 산업으로 업그레이드 시킬 수 있는 비전도 함께 내놓아야 한다. 20년간 미뤄오던 숙제를 막바지에 벼락치기로 밀어붙이는 졸속을 범해서는 안 된다.
